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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작가 나혜옥 Oct 18. 2024

당신의 사랑이 당연할 줄 알았습니다

엄마의 허기진 청춘

"엄마 마음에 들어?"

"아니"

"엄마 그게 마음에 안 들면

이제는 더 이상 사러 갈 때가 없어"

"아니, 내 몸이 마음에 안 든다고"

'헐'

엄마는 새로 사 온 잠옷을 입고 거울에 비친

당신 모습을 요리조리 살펴보신 후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엄마는 며칠 전 분홍색 잠옷을 사달라고

말씀하셨다.

까다로운 엄마의 성격을 아는 나로서는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이 받기 위해

비비안 매장에서 가장 비싼 신상품을 샀다.

엄마에게 의기양양하게 잠옷을 입혀 드렸더니

엄마는 색이 칙칙하다, 목선이 라운드가 아니다,

레이스가 달려서 애들 옷 같다고

갖은 불만을 말했다.


시간 내서 발품 팔아 사 온 딸의 정성은

일순간에 무시되고 반품 결정이 났다.


'여든여섯 노인이 무슨 잠옷이람'

'편안한 옷 아무거나 입으면 되는 거 아닌가'


꾸역꾸역 올라오는 짜증을 참고,

시장에 가서 다시 사 오겠다고 했다.


마침 엄마가 드시던 새우 장도 떨어졌고,

명란젓도 살 겸 시장에 나갔다.

속옷 전문매장에 가서 엄마가 원하는 형태의

잠옷을 꼼꼼히 골랐다.

나는 신혼여행 가는 날과 신혼 초에만

잠옷을 입었다. 그래서 잠옷은 신혼에만

입는 옷인 줄 알았다.

그 후로는 계절마다 편안한 자루형 원피스를

잠옷으로 입고 있어서

엄마가 잠옷을 입는 게 이해가 안 됐다.

더군다나 아프다고 소파에 누워 꼼짝도 안 하는

엄마가 옷 갈아입다 낙상할 것도 걱정이 되었다.

엄마의 모든 동작은 슬로우 비디오다

옷 하나 입고 벗기도 힘든데

단추가 많은 잠옷을 입고 벗는 게

귀찮을 텐데, 왜 잠옷을 입으려고 하시는 걸까,

나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내 삶이 편하기 위해 의문은 남겨둔 채

잠옷을 샀다.


엄마가 새로 산 잠옷을 입고 나오니

"어머니 환하고 좋네요"

남편이 엷은 미소를 띠고 말하니

엄마는 마지못해 웃는다.

말하는 남편도 대답하는 엄마도

썩 탐탁지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 몸집에는 105 사이즈가 맞는다.

몸집에 옷을 맞추니 남는 팔다리의 천은

갈 곳을 잃고 헤매는 패잔병 같다.


더 이상 엄마 마음에 드는 잠옷을 사 올 때가

없다고 딸이 으름장을 놓기도 했고,

이걸 입나 저걸 입나

엄마 마음에 꼭 드는 옷은 찾기 힘들다고

체념을 한 엄마는 소매와 바지단을 접어서

입겠다고 한다.


나는 더 이상 잠옷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옷이 아니라 당신 몸이 마음에

안 든다는 엄마를 위로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일모레면 구순의 되어가는 엄마는

아직도 청바지를 입고 싶어 한다.

우리 부부가 청바지를 나란히 입고 가면

"나도 청바지 사줘라"

"청바지가 뻣뻣해서 엄마는 못 입어"

"나도 젊어서 청바지 입고 싶었는데"


엄마의 채워지지 않는 젊은 날의 허기가

지금도 엄마를 슬프게 한다.

엄마가 아프기 전에

엄마가 지금보다 뚱뚱하기 전에

나에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와 나란히 청바지를 입고

낙엽을 밟으며 마로니에 공원이라도 걸었을 텐데,

8년 전 대학로에서 엄마가 보고 싶다는

품바 연극을 보던 날,

그날이라도 청바지를 사달라고 했다면

지금처럼 청바지를 입고 싶어도 못 입어

애달프지는 않았을 텐데,


하긴 안 아픈 엄마가

팔십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무슨 용기로 청바지를 입었을까


엄마의 허기진 청춘이 채워지지 않아

피에로 복장 같은 잠옷을 입고

거울을 응시하는 엄마를

나는 오늘도 모른 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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