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도식(無爲徒食)의 꿈?
묵자(墨子, BC 470–391)는 무위도식(無爲徒食)을 가장 경멸한 사상가였다. 그의 세계에서 노동은 생존의 수단 이전에 도덕의 문제였다. 손으로 공동체에 기여하지 않는 삶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었다.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역시 노동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다. 그는 노동가치설을 토대로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 구조를 비판하며, 노동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오늘날 일론 머스크(Elon Musk, 1971– )는 이 오래된 노동의 가치를 근본부터 흔든다. 로봇과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인간 무노동 시대를 예언한다. 더 나아가 로봇이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가 보편적 고소득을 보장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무위도식의 현실화이자 노동해방의 완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초고령 사회의 현실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의 존재감은 무엇으로 채워질 것인가.
묵자, 마르크스, 머스크는 노동을 다르게 말하지만 하나의 사상적 궤적 위에 놓인다. 묵자는 노동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정당성을 세우려 했고, 마르크스는 노동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 실현을 회복하고자 했다. 머스크는 노동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인간의 노동해방과 복지사회를 꿈꾼다. 이 지점에서 생각이 깊어진다. 노동이란 무엇이며, 노동이 사라질 때 인간은 무엇인가? 묵자에게 무위도식은 도덕의 붕괴였고, 마르크스에게 노동의 소외는 인간성의 붕괴였다면, 머스크의 시대에 무위도식은 오히려 기술이 허락한 새로운 삶의 조건이 된다. 문제는 그 조건 속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로 다시 서느냐이다.
매년 수백만 명이 정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동시에 우리 사회는 빠르게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65세 이상 인구는 이미 전체의 20%를 넘어섰다. 이들은 사회적 노동시장에서 밀려났지만, 여전히 노동하는 존재로 남고자 한다. 유통기한은 지났을지 몰라도 사용에는 문제가 없다는 듯, 자신의 쓸모와 존재감을 계속 증명하고 싶어 한다.
정년 이후의 삶은 자유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하루는 상상보다 길고, 시간은 예전의 공간보다 넓어져 삶을 압도한다. 여행하고, 운동하고, 악기를 배우고, 미식의 세계를 탐한다. 개인으로서는 자유를 만끽하지만 사회적 존재로서의 존엄은 시간이 갈수록 탈색된다. 그러다 고정된 자산과 줄어든 생활비 앞에서 다시 노동시장을 기웃거리며, 잃어버린 존재감을 되찾고자 한다. 이것은 노동하는 인간으로 살아온 인간 군상의 집단적 증후군일까, 아니면 아직 놀이하는 인간으로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노동 가치 전환 시대의 애처로운 인간상일까.
노동의 가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노동은 사라질 수 있어도, ‘쓸모 있고자 하는 욕망’, ‘필요한 존재로 남고자 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술은 노동을 대체할 수 있지만, 인간이 존재하고자 하는 이유까지 대체하지는 못한다.
결국 인간의 꿈은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삶, 그 자체가 아니다. 진정한 꿈은 인간 개개인의 존재감이 지속적으로 실현되는 삶이며, 그 실현이 가져오는 기쁨과 행복을 서로 나누는 삶이다. 노동은 원시 수렵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이르기까지 그 실현의 한 방식이었을 뿐이다. 초고령 사회와 로봇의 시대에 인간은 더 이상 일하는 존재가 아닐 수는 있어도,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서 역할과 존엄을 보장받는 삶은 결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