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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레리나 Aug 07. 2022

내 방 마련의 꿈

부모님의 대화법

내가 기억도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은 오빠와 내 통장을 만들어주셨다.

국민은행이 무려 주택은행이던 시절에 만든 통장인데, 은행 어플리케이션에 로그인하면 내 통장의 첫 개설일이 1991년 7월로 나온다.

만 세 살이 되기 전에 내 통장을 가진 것이다.


어릴 적 통장에 저축하는 돈은 대부분 세뱃돈과 주변 어른들로부터 받은 용돈이었고,

가끔씩 돼지저금통이 꽉 차면 돼지 배를 갈라서 그동안 모은 돈을 저축하기도 했다.

돈이 생기면 부모님께 대신 저축을 부탁드렸는데, 은행에 다녀오신 날에는 꼭 통장을 보여주셨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잔액을 보는 것이 작은 재미였고, 덕분에 돈 모으는 뿌듯함을 일찍 알게 되었다.


통장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행의 잔액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뒷자리 숫자부터 콕콕 집어가며 읽었다.

"일십백천만 십만..."


어쩌면 내가 금융업에 종사하게된 시작점일까




내방 마련의 꿈


전세로 신혼생활을 시작하신 부모님은 결혼 7년 차쯤 서울에 재개발 예정인 아파트를 매수했다. 그땐 착실히 돈을 모으면 집을 살 수 있는 시절이었고, 두 분은 정말 열심히 저축한 돈으로만 아파트를 계약했다.


엄마 아빠와 함께 모델하우스라는 곳에 처음 가봤던 기억이 난다.

넓고 환한 집, 새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침대가 없어서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는데, 새 집에 들어간다면 꼭 침대가 생기기를 바랐다. 그리고 상상 속 침대는 길게 드리워진 공주님 캐노피와 뗄 수 없는 한 세트였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일 것 같다.

어느 날 엄마는 오빠와 나에게 각자의 통장을 주시면서 중요한 말씀을 시작하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수한 아파트의 중도금이나 잔금을 치러야 할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 하셨던 말씀의 주요한 내용은 이렇다.


새 아파트를 사려면 돈이 필요한데, 우리 통장에 있는 돈도 함께 모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우리 남매가 통장에 저축한 금액은 아파트의 방 한 칸씩에는 역부족인 금액이지만, 그래도 이 돈을 함께 모아 집을 사면 각자의 방을 한 칸씩 주시겠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제안인가.

어린 마음에 이리저리 따져봐도 부족한 돈으로 방 한 칸이 생긴다니 나에게는 남는 장사였다.

물론 돈을 내지 않았어도 내 방을 주셨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족 아이가!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는 몇백만 원이 든 통장을 내놓았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부모님의 화법은 정말 감탄스럽다.

현 상황을 솔직하게 공유한 뒤 생각한 해결 방안에 대해 제시하고 그 방향을 따를 것인지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선택에 맡겼다. 이 시대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비록 내 통장 잔고 대부분이 부모님의 주머니에서 온 것이지만 '딸의 돈'으로 인정해주셨다.

그래서 마음대로 돈을 출금하지 않고, 집 사는 데에 돈을 보탤 것인지 의견을 물었고, 되도록이면 그렇게 하도록 설득을 하셨던 것이다.


‘애들이 뭘 알겠어’라고 여겨 사전 설명 없이 돈을 빼서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미성년자의 금융거래는 부모님만이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아이들이 울고불고할 확률이 높다.

'네 돈이 엄마 돈이야' 혹은 '너를 지금까지 키우는데 돈이 더 들었어'라는 말은 아이들이 감정적으로 납득하기 어렵고 설득이 아닌 강요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어리지 않다. 상황을 이해하고, 주어진 선택지를 비교해 볼 수도 미래를 계획할 능력도 있다. 최소한 내가 통장을 내놓았던 그 나이에는 말이다.

우리 남매는 부모님의 설명을 듣고,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었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다룬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소란한 보통날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아빠와 엄마는 어린애 속임수 같은 대답은 하지 않았다'

소설 속 아빠와 엄마는 사 남매의 질문에 항상 성심성의껏 대답한다. 아이라서 얼버무려 대답하는 법이 없었고, 항상 자녀들의 생각과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아이들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에 감탄했고 놀라웠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이 생각났다. 내가 이렇게 놀라워하는 인물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그려본 어린시절 내 방




산타는 몇 살까지 믿어야 할까


요즘은 아이들의 빠진 치아를 베개 밑에 두고 자면 이빨요정이 이빨을 가져가고, 선물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꾸며내어 하는 것이 과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을까?

혹시 어른들이 요정 이야기를 믿는 아이의 순수한 모습을 보고 싶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머리맡에 놓여있는 선물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닐까? ESTJ는 의문이 든다.


이빨요정의 선물 덕분에 아이들은 공포심 앞에서 용기를 좀 낼 수는 있겠지만, 곧 딜레마에 빠지는 시기가 올 거라 생각한다.

한 두 살 더 나이를 먹고 나서 요정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거나

유독 내가 갖고 싶어 했던 선물만 가져다주는 이빨요정의 높은 적중률에 혹시 엄마 아빠가 사다 놓는 게 아닐까 의심이 생길 때,

아이들로 하여금 더 이상 이빨요정을 안 믿는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선물을 몇 개 더 받을 때까지만 믿는 척을 할지 고민하게 만들진 않을까.


라떼는 이빨 요정 대신 제비가 있었다.

빠진 이를 지붕에 던지면 제비가 물어가고 예쁜 새 이를 가져다준다고 했다. 동화책에서 보았던 지붕도 처마도 없는 아파트에 살았던 나는 예쁜 새 이가 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때 부모님께서는 유치와 영구치의 개념에 대해 설명해주시고, 이가 흔들리는 시기에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게 유치가 빠지면 자연스럽게 튼튼한 영구치가 난다고 알려주셨다.


물론 혹시나 하는 딸의 걱정을 불식시켜 주기 위해 시골 외할아버지 댁에 갈 때 빠진 이를 챙겨가서 지붕 위에 던지는 퍼포먼스도 잊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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