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불완전해서 아름답다
영화 <어느 멋진 아침>은 어린 딸 린(카미유 르방 마르탱)과 함께 살며 퇴행성 질환으로 투병 중인 아버지 게오르그(파스칼 그레고리)를 간병하는 산드라(레아 세두)의 일상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산드라는 파리에 사는 평범한 여성이다. 산드라의 삶에는 아이의 성장과 병으로 인해 인식 능력이 저하되는 아버지와의 주기적인 만남, 우연히 만난 옛 친구 클레망(멜빌 푸포)과의 새로운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상이 그렇듯이 그들은 완전하지 않으며 각기의 불안을 품고 있다. 학생들과 자식들의 존경을 받을 만큼 명망이 있던 아버지가 쇠잔해 가는 모습이나 가정이 있는 남자와의 사랑은 산드라의 잔잔한 일상에 언제든지 큰 파문을 일으킬 것처럼 잠재적인 위험을 품고 있다.
일요일 오후 네 시의 멜랑콜리처럼 평온하지만, 마음 한구석 어딘가를 불안하게 하는 감각은 <어느 멋진 아침>을 관통하며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지속된다. 맥락을 제시하는 명확한 플롯 안에서 존재하는 장면들이 마침내 모여 결말을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카타르시스는 없다. 이렇듯 프랑스 영화 관람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어딘가 불편한’ 느낌은 인간 삶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에서 온다. 그들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운율로 절망 속의 희망을 다루는 드라마 영화와 다르고, 화면적 장치를 통해 극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화려한 구성의 영화들과도 다르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이 내세운 주인공은 누구보다도 우리네 삶을 정확히 투영하면서, 일상의 반복적인 형태와 그 안의 무료함,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에 대한 막막한 불안들을 꾸밈없이 내보인다. 그러므로 관객들은 그들이 화면 안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산드라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고질적인 막막함에 대한 윤색 없는 조명이 마냥 냉소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작 중 게오르그와 산드라는 다른 삶과 시간 속에 살면서도 사랑이라는 작은 원동력으로 각자의 일상을 지속해 나간다. 희귀성 질환은 게오르그의 정신과 영혼, 희망을 갉아먹으며 그를 어둠으로 안내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 연인과 딸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다. 게오르그는 불안정한 기억 속에서도 연인의 이름을 찾아내고, 샌드라를 향한 애정과 신뢰를 드러낸다. 또한 샌드라의 사랑은 반복되는 지난한 일상의 한줄기의 기쁨이 되기도 한다.
영화가 차츰 결말로 향하면서 우리는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다. 린, 샌드라, 게오르그는 모든 인간이 반드시 거치는 삶의 단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일상을 통해 확인했듯이 우리의 시절은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마모되면서 언젠가 모두 늙고 병들어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차츰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절망의 바닥에 판도라의 작은 희망이 남아있다면, 삶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작 중 샌드라가 자기 모습조차 제대로 구분할 수 없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의 영혼이 육신의 껍데기 속이 아닌 서재의 책에 담겨 있는 것 같다고 한탄하는 대사가 있다. 이는 자칫 애처롭고 절망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아버지의 책들이 그를 존경했던 학생들에게 나누어진 것을 고려해 보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이것은 단순히 노화되어 자신을 잃는 인간 삶의 비애뿐만 아니라, 산드라가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영혼이 누군가의 또 다른 희망이 되거나, 삶의 일부분이 되어 영속될 것을 암시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산드라와 클레망은 린에게 ‘집’의 방향이 ‘앞’에 있음을 명시한다. 카메라가 지시 방향을 비추면서, 관객은 그들과 함께 ‘앞’을 보게 된다.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이 없는 것처럼, 완전한 불행도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 인간의 한정적인 삶은 불행과 행복의 점철이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노골적이고 상냥한 방식으로 보여준 것처럼,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상의 작은 희망들로 노화, 죽음과 같은 불가피한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