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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Sep 29. 2021

엄마에게는 너무 높은 콜센터의 벽

날씨가 흐린 탓이었을까? 엄마는 어제 네 번이나 전화를 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설마 또 엄마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엄마였다. 엄마가 전화를 하면 되도록 받으려고 한다. 나는 전화를 거는 것도 받는 것도 힘든 45살 여자, 하지만 엄마에게는 전화 공포 따위 없이 언제나 당찰 것 같은 딸이니까.


이모와 통화를 하다가 마음이 상해서는 한 시간 동안 하소연하는 전화가 시작이었다. 두 시간 지났을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카드회사에 전화를 해야 하는데 통화가 너무 어렵다고 전화한 것이다. 엄마가 살고 있는 집에 동생이 얹혀살고 있다. 엄마는 여러 번 올케에게 카드회사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아는 것처럼 콜센터와 바로 통화하기는 힘들다. 지금은 통화량이 많아서 연결이 어렵습니다. 통화가 끝나는 대로... 올케는 이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 통화가 어렵대요.'라며 끊고 다시 부탁하기 어려워서 엄마는 내가 듣기로도 한 달이 넘게 카드회사에 전화하기 힘들다는 말만 하고 있었다.


날씨가 흐린 탓이었을까? 한 달이 넘게 같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엄마, 조금만 신경 써 주면 좋을 텐데 생각하니 서운했다. 카드회사가 아무리 통화가 어렵다고 한들 한 달 동안 안된다고? 나는 엄마가 말한 카드회사에 전화를 했다.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이라는 멘트가 십몇 분이 지나고 결국 다시 전화를 걸어달라며 전화가 끊겼다. 오기가 생겼다. 다시 통화를 눌렀다.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이라는 말에도 끝까지 기다렸다. 12분쯤 드디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상담원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저희 엄마가 연세가 많으셔서 고객센터와 통화하기가 너무 힘드시다고 해서요. 상담원님께서 시간 편하실 때 저희 엄마께 전화해 주시면 안 될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예상하지 못한 상담이라 놀란 것 같았다. '네 고객님. 전화번호를 불러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시간이 흐른 뒤 전화벨이 울렸다. 또 엄마였다. 엄마는 그렇게 어려운 카드회사와 통화를 했다고 기뻐했다. 아무리 같이 살아도 여러 번 부탁하기 어려운 며느리, 역시 딸이 있어야 한다고 좋아했다. 너는 딸이 없어서 어쩔래? 나를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여유와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그래서 정신 바짝 차리고 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알아서 해야지.'라고 말하는 내 말에 엄마는 소리 내어 웃었다. 카드회사 상담원과 한번 통화한 것뿐인데 엄마의 기분은 흐림에서 맑음으로 햇볕 쨍쨍이다.


나도 며느리다. 17년 동안 시어머니께 안부 전화한 것이 한 손안에 들만큼 불량스러운 며느리다. 엄마를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엄마 집에 얹혀산다고 해도 시어머니가 어려울 거라는 생각에 올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매번 조금씩 서운할 때가 있다. 그래도 내색은 않고 명절에는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나름 이것저것 챙겨줬는데 올케는 무던한 성격만큼 엄마한테도 무던하게만 대했다. 살가운 것 까지 바라지 않지만 나이 많은 어른이 혼자 낑낑대면서 어렵게 부탁한 일 한 달 넘게 나 몰라라 한 것 같아서 서운했다. 물론 나도 어쩔 수 없는 시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서운해하는 것부터가 시누이 짓이다.


그렇게 걱정되면 내가 챙겼어야 했는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가 도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문제다. 엄마가 말할 때마다 동생이나 올케하고 같이 있을 때 전화해보라고 말하고 말았으니 엄마는 혼자 얼마나 답답했을까? 일하는 동안은 전화를 안 받는 아들에게 엄마는 부탁할 사람이 아니다. 엄마는 이상하게 아들은 일하느라 힘들고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다면서 옛날부터 꼭 딸에게 전화하는 버릇이 있었다. 분명 같이 사는 아들 내외와 의논하면 더 쉬운 일인데도. 콜센터 상담원에게 민망함을 무릅쓰고 부탁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나도 성의가 부족했다. 일이 쉽게 해결된 것을 보고 나는 엄마한테 미안했다. 엄마한테 신경 써주지 못하고 미뤄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엄마는 딸은 그런 말 안 해도 된다고 통 크게 나를 용서해준다.


다시 한 시간 후에 전화가 울렸다. 세상에 또 엄마였다. 콜센터와 통화가 기분 좋았는지 산책을 하고 돌아온 엄마는 '너도 자주 산책해. 산책하니까 참 좋다.'라고 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가볍고 상쾌했다. 엄마는 통화 한번 하기 복잡하고 힘든 콜센터의 벽이 없는 딸에게 수시로 전화하고 싶은가 보다. 엄마의 전화를 받을 때조차 전화에 대한 공포를 극복해야 하는 나는 엄마의 전화만은 기꺼이 받으려고 한다. 세상에 엄마가 마음 편히 전화할 번호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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