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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호 Jan 16. 2021

평범하고 보편적인 영화이기에

영화 <화차>(2012), <마돈나>(2015)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화차>(2012)와 <마돈나>(2015)는 두 주인공 여성의 평범한 이상(理想)을 그려낸다. <화차>의 경선, <마돈나>의 미나가 간절히 바라는 이상(理想)은 단 한 가지.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경선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싶고, 미나는 누군가와 취미를 공유하고 어울리며 사랑받고 싶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인간의 본질이 가진 아름다움이, 이들의 삶에는 결핍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이 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의 삶이 스크린 밖의 여성의 삶과 이질감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화차>, <마돈나> 포스터 (출처 : 다음 영화)


영화 <화차>와 <마돈나>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사는 여성이 더 밑바닥으로 침몰하는 영화’이다. 경선과 미나의 삶은 참혹 그 자체이다. 그 참혹함은 성(性)이라는 오브제(Objet)와 결부되어 있다. 두 영화에 나타난 성은 곧 계급이고 권력이다. 남성과 여성은 수직관계로서, 남성은 여성을 위(上)에서 깔아보고 여성은 남성의 무릎 밑(下)에서 올려다보는 나약한 존재로 표현된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성노동을 강요당한다. 먼저 <화차>의 경선은 IMF 이후 아버지가 사채 빚을 갚지 못해 쫓아다니는 대부업자들을 당해내지 못한다. 이후 성노동을 강요당하며 그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마저 잃게 된다. <마돈나>의 미나는 몇 직장에서 노동을 하지만 직장 남성들로 인해 수많은 상처를 입고 성노동을 강요당하기까지 한다.

이들에게 성노동은 어쨌든 노동(勞動)이다. 노동은 ‘사람이 생존·생활을 위하여 특정한 대상에게 육체적·정신적으로 행하는 활동’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자의로 이루어져야 할 노동을 타의에 의해 강요당하며 생존을 위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노동의 정의(正義)이다. 물론 미나의 경우,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경선의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노동을 강요당하지만 미나는 보험회사에 근무할 때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남성에게 자의로 다가간다. 인간관계가 결핍되어 있는 미나에게 남성이 내민 조그마한 정(情)은 미나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미나는 그저 온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남성은 흑심만이 가득했다. 남성에게 미나는 성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의 수단일 뿐이었다. 미나가 남성에게 먼저 다가간 행동이 결과적으로 남성의 욕망을 자극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미시적 관점일 뿐, 거시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미나가 노동하는 환경 자체를 먼저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미나가 일했던 보험회사 사무실, 일렬로 줄을 서서 화장품을 포장하는 공장 모두 꼭 닭장과도 같았고, 닭장 속 닭은 모두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을 관리하는 성은 모두 남성이다. 경쟁 회사에 고객 명단 이메일을 보내달라는 남성 상사의 부탁을 들어줬다는 이유만으로 미나는 퇴직을 당한다. 직장이라는 사회에서 남성이 지배하는 권력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미나 또한 경선과 같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피해자가 회사의 환경을 망가뜨린 가해자가 된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미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상사의 자리에 변을 놓는 엉뚱한 복수일 뿐이다. 웃음이 나와야 하는 장면에서 개인적으로 웃을 수 없었던 이유는 미나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너무나도 크게 들렸기 때문이다.


영화 <마돈나> 스틸 (출처 : 다음 영화)


결국 경선과 미나는 타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경선은 자살을 한다. 하지만 경선이 자살을 결심하기 전까지 살아오던 환경이 경선에게 자살을 보채는 무언의 압박을 넣었다고 생각한다. 벼랑 끝에서 그저 평범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경선에게 무슨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싶다. <화차>의 부재인 'helpless'(무력한) 또한 경선의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말 그대로 이 사회 앞에서 무력했다. 과거 가부장제(家父長制) 사회의 개념이 남성 우월이라는 변질된 관습을 만들어냈으며 여성은 남성이 사회에서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 경선이 자신의 삶을 아버지에게 희생당한 이유도 결국 사회의 관습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화차> 스틸 (출처 : 다음 영화)


경선과 미나는 여성이 자리 잡기 어려운 사회 속에서 어쨌든 엄마(母)였다. 엄마라는 존재는 인간 사회의 실질적인 존재의 근원이자 지탱하는 한 축이다. 하지만 경선과 미나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타의에 의해 엄마가 된다.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강제적인 성행위에 의해 아이의 탄생을 기다린다. 이들에게 아이의 탄생은 암울했던 삶에 대한 자그마한 축복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타의에 의한 임신이어도 말이다. ‘나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니.’라는 생각은 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그리고 <마돈나>에서는 존재성에 대한 희망을 가리킨다. 미나의 아이는 미나의 뱃속에서 탄생한다. 미나는 아이를 낳은 후 죽는다. 미나의 생명이 아이에게 이어지고 아이는 미나의 생명을 연장해야 할 의무를 받는 것이다. 그 생명을 남성 의사가 탄생시키는 장면은 여성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희망과도 같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아이의 성별은 남성인지 여성인지 나오지 않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 여성일 것 같다. 의사가 아이에게 엄마와 똑같은 미나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도 그렇고, 고아로 태어난 여성 아이가 또 한 명의 잔 다르크(Jeanne d'Arc)가 되길 바라는 엄마 미나의 이상(理想)이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그저 네일아트를 좋아하는 평범한 여성으로 살길 바랄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마돈나> 스틸 (출처 : 다음 영화)


두 영화는 여성의 노동현장에서의 삶을 그려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여성의 존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는 어떤 존재라고 한마디로 형용하긴 어렵지만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머릿속에는 여성의 존재가 인지되어 있는 상태이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우월하다. 사회에서, 기업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영화판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자리해있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보면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참 이상한 현상이다. 하지만 분명 사회의 잘못된 관습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펼쳐야 할 날개를 억압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윤리적, 문화적인 관점에서 큰 부당함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화차> 스틸 (출처 : 다음 영화)


김도영 감독의 영화 <자유연기>와 <82년생 김지영>이 관객에게 울림을 주었던 이유는 여성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그려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그저 평범한 주부이다. 영화에서 두 주인공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남들처럼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오디션을 보러 가서,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에게 혹은 남성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으며 말이다. 평범함이 당연함이 될 수 없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그저 평범함’이라고 이야기한다. 위의 두 영화와 <화차>, <마돈나>가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그려진 영화이기에’가 아닌 ‘평범하고 보편적인 영화이기에’라는 이유로 울림을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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