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윤 Sep 23. 2020

급기야 연기를 배운다 3

취미가 관객인 사람의 연기 체험기

첫 시간이 끝나고 우리가 의논했던 것은 다음 시간에 읽을 희곡이었다. 그중 베르나르다 알바 표가 제일 많았고 그다음이 리어 왕이었다. 그렇게 리어 왕을 읽을 차례가 돌아왔다. 리어 왕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 왕은 쓰인 지 오래된 고전 작품이었고 베르나르다 알바보다 더 오래된 어휘로 쓰여 있었다. 입에도 잘 붙지 않고 심지어 오래된 대본이라 눈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매 시간마다 주제가 있었는데 첫 시간처럼 맘에 드는 대사를 적어간다거나 두 번째 시간에 베르나르다 알바의 한 장면을 읽어봤듯이, 이번 시간엔 리어왕의 오래된 대사를 현대어로 바꿔가는 것이 과제였다. 하지만 나는 회사 일과 외주로 너무 바빴다. 점점 바빠지는 업무 탓에 다음 시간까지 지장이 생겼다. 무엇보다 나는 이 과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고른 장면은 막내딸 코딜리어가 자신은 달콤한 말을 하지 못한다는 소신 발언을 하는 장면이었다. 실제로 빈말은 잘 못하는 성격이지만 희곡 속 인물과 달리 나는 소신 발언보다는 침묵을 택하는 쪽이었다. 단순히 윤문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열심히 대사를 읽어가며 말을 고쳤지만 최종 단계는 각색이었다. 이야기의 원형을 살리며 현대식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서로 가치관이 맞지 않는 커플, 회사 상사와의 이야기 등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가 있었고, 단순한 윤문을 거친 내 대사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 속상해서 이 지긋지긋한 리어왕과 헤어지길 바랐다. 심지어 지긋지긋한 감기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목은 쉬어가고 기침은 점점 심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지겨운 리어 왕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정말 즐거웠다. 멋진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도 좋지만 대사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몇 번을 읽어보며 인물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이런 상황엔 어떤 행동을 할까, 다른 상황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상상했다. 그렇게 새로 만나게 된 극본은 작은아씨들이었다. 이번엔 소설을 토대로 호스트가 직접 써준 대본이었다. 크리스마스 아침 네 자매가 잠에서 깨어나 각자의 선물을 보며 기뻐하는 장면으로 사이좋은 자매의 모습이 그려졌다. 어릴 때 좋아했던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만난 기분이라 반가웠다. 그리고 이 대본은 연기 모임을 마무리하는 5분 리딩의 대본이 되었다. 


아주 어릴 때 친구 손을 잡고 갔다가 잠깐 다녔던 교회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적이 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나는 그때 연극에 나갔다. 나는 이미 연기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짧은 기억에 남은 것은 별로 없지만 연습하며 매트에 누워 잠시 한숨 돌리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의 즐거움이 남아있기라도 했던 걸까. 게다가 어릴 때부터 좋아한 작은아씨들이라니 즐겁고 좋은 기억만 가득 쌓인 느낌이었다. 선물 같은 작은아씨들의 대본을 보며 오랜만에 만난 베스를 보며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급기야 연기를 배운다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