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제 속도로 달리고 있을까

숨소리를 들어야 오래 달린다

by kimdonglin



달리기를 할 때 들이쉬는 공기가 있고, 내쉬는 공기가 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걸 의식하면서 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에 맞춰 발을 내딛고, 숨은 알아서 쉬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들숨과 날숨의 존재를 굳이 떠올릴 이유가 없다.


어느 날 이어폰을 뽑고 달렸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충전이 안 돼 있었을 뿐이다.


그때 처음으로 숨소리를 들었다. 발이 땅을 딛는 소리, 바람 소리, 그 사이로 호흡이 들렸다. 들이쉬고, 내쉬고. 생각보다 규칙적이었다.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흥미로운 건, 이게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는 거다. 2012년 PLOS ONE에 실린 연구는 엘리트 모험 레이서들에게 호흡 부하를 주고 반응을 관찰했다. 결과는 일반인과 달랐다. 같은 불편한 호흡 상황에서 이들은 더 안정된 수행을 보였고, 뇌의 반응 패턴도 달랐다. 연구자들은 이 차이를 '내수용감각(interoception)' — 몸이 보내는 내부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 — 과 연결지었다. 이어폰을 뽑은 그날, 처음으로 그 신호가 들렸던 셈이다.


처음엔 고르다. 발 리듬에 맞춰 들이쉬고, 내쉬고. 별것 아닌 것처럼 반복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들이쉬는 양이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내쉬는 게 밀리는 것 같기도 하다. 밸런스가 깨진다.

이건 신호다.


운동생리학에는 '환기역치(Ventilatory Threshold)'라는 개념이 있다. 운동 강도가 올라가면서 몸은 두 번의 전환점을 맞는다. 첫 번째 전환점(VT1)은 숨이 살짝 가빠지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대화는 아직 가능하지만 여유가 줄어든다. 두 번째 전환점(VT2)을 넘으면 호흡이 급격히 빨라지고, 오래 버틸 수 없는 영역에 들어선다. 쉽게 말하면 VT1은 주황불이고, VT2는 빨간불이다.

중요한 건 그 신호를 느꼈다는 거다. 느끼려면 들어야 한다. 숨소리를.


숨이 차오를 때 속도를 올리지 않는다.


대신 숨을 바꿔본다. 들숨을 좀 더 깊이 밀어넣어 본다. 안 되면 날숨을 좀 더 확실히 뱉어본다. 같은 속도를 유지한 채, 호흡만으로 리듬을 찾는 거다.


이 감각적인 시도에 과학적 근거가 있을 수 있다. 2022년 Frontiers in Physiology에 실린 리뷰 논문은 의식적인 호흡 속도 조절이 운동 강도를 조절하는 수단이 될 가능성을 정리했다. 일부 연구에서는 호흡을 의도적으로 느리게 했을 때 교감신경이 억제되고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서 주관적인 운동 강도가 낮아지는 경향이 관찰됐다. 다만 이 결과의 상당 부분은 사이클링이나 휴식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 달리기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하다. 그래도 가리키는 방향은 비슷해 보인다. 모든 러너에게 통하는 절대적인 '최적 호흡률'은 없지만, 자신에게 맞는 리듬을 찾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달리기 중 호흡과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동기화되는 경향이 있다. Daley, Bramble & Carrier가 2013년 PLOS ONE에서 보인 것처럼, 인간은 달리는 동안 호흡과 보행의 리듬을 맞추려 한다. 연구자들은 이 동기화가 잘 이루어지면 호흡근의 부담이 줄고, 피로를 늦출 수 있다고 보았다. 반대로 리듬이 깨지면 호흡근이 보행의 충격과 싸우면서 에너지를 더 쓸 가능성이 있다. 숨이 차오르는 순간은, 어쩌면 이 동기화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숨이 돌아오면 주황불이었던 거다. 그대로 간다.

돌아오지 않으면 빨간불이다. 그때 비로소 속도를 줄인다. 조금만. 그리고 다시 숨 밸런스를 맞춘다.


이걸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속도와 호흡이 맞물린다. 둘이 맞물리는 지점이 오면, 한참을 뛸 수 있다. 그날 처음 이어폰 없이 달렸을 때가 그랬다. 숨소리밖에 없었는데, 오히려 평소보다 오래 달렸다.


달리기 바깥에서도 숨이 차는데 멈추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마감이 있으니까, 옆자리가 저만큼 앞서가니까, 여기서 늦추면 안 될 것 같으니까. 숨이 거칠어지는 걸 알면서도 속도를 줄이지 못한다. 줄이면 뒤처질 것 같고, 멈추면 끝날 것 같다. 달리기에서 배운 게 있다면, 숨을 무시하고 속도를 유지하는 건 가장 나쁜 전략이라는 거다.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몸이 안 움직인다. 그제야 안다. 빨간불이 한참 전에 켜져 있었다는 걸.


그런데 이건 단순히 개인이 숨을 못 들은 탓만은 아니다. 애초에 숨소리가 들릴 수 없는 환경이 문제다.


주변을 보면 숨이 찬 채로 달리는 사람이 너무 많다. 직장에서, 사업에서, 육아에서, 관계에서. 다들 헉헉대고 있는데 멈추질 못한다. 멈추면 도태되고, 늦추면 뒤처지고, 쉬면 게으른 사람이 된다는 공포가 깔려 있다. 이어폰을 뽑으면 숨소리가 들리듯, 삶에서도 외부 소음을 줄여야 자기 신호가 들린다. 그런데 지금은 안테나가 너무 많다. 슬랙 알림, 카톡 메시지, SNS 피드, 뉴스 속보. 하나하나가 전부 외부에서 오는 신호다. 귀가 두 개뿐인데 스무 개의 채널이 동시에 울리고 있다. 그 소음 속에서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더 문제는, 숨이 차다는 걸 알아도 조절할 방법을 모르는 경우다. 달리기에서는 간단하다. 숨을 밀어넣거나, 뱉어보거나, 안 되면 속도를 줄이면 된다. 그런데 삶에서는 속도를 줄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가르쳐주는 건 속도를 올리는 법뿐이다.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회사, 더 높은 직급. 가속 페달만 있고 브레이크는 없는 차를 몰고 있는 셈이다.


결국 무너지는 사람을 본다. 번아웃이라는 이름으로, 우울이라는 이름으로, 퇴사라는 이름으로. 전부 빨간불을 무시한 결과다. 주황불이 켜졌을 때 호흡을 조절했으면 괜찮았을 것들이, VT2를 한참 넘긴 뒤에야 몸이 멈추는 방식으로 신호를 보낸다.


왜 멈추지 못하는 걸까. 숨이 차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을 '성과주체'라고 불렀다. 과거의 사회가 "하지 마라"로 사람을 통제했다면, 지금의 사회는 "할 수 있다"로 사람을 움직인다. 금지가 아니라 가능성이 채찍이 된다. 누가 달리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스스로 달린다. 더 빠르게, 더 오래, 더 멀리. 멈추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다. 한병철의 표현대로라면, 현대인은 타인에게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숨이 찬 줄 알면서도 속도를 줄이지 못하는 건, 바깥에서 오는 압력보다 안에서 오는 압력이 더 세기 때문이다.


2,500년 전에도 이미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본 사람이 있다. 노자는 '무위(無爲)'를 말했다. 흔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되지만, 무위는 억지로 힘을 주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춰 움직이는 거다. 달리기에서 숨이 차오를 때 속도를 더 올리는 건 무위의 반대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의지로 밀어붙이는 거다. 반대로, 숨소리를 듣고 호흡을 조절하는 건 무위에 가깝다. 억지로 더 밀어넣는 게 아니라, 들숨과 날숨의 균형이 돌아올 수 있도록 몸에 여지를 주는 거다. 노자가 말한 물의 비유처럼, 물은 바위를 밀어내지 않는다. 바위를 돌아간다. 그리고 결국 더 멀리 간다.


파스칼은 17세기에 이렇게 썼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온다". 『팡세』 139번 단상이다. 400년 전 문장인데, 슬랙 알림과 SNS 피드 사이에서 숨소리를 듣지 못하는 지금과 겹쳐 보인다. 파스칼이 본 것은 인간의 '기분전환(divertissement)' — 끊임없이 무언가에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본성이다. 조용히 앉으면 자기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그게 불편하니까 계속 달린다. 이어폰을 뽑지 않는 건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라, 숨소리를 듣는 게 불편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세 가지 시선은 결국 한 곳을 가리킨다. 멈추지 못하는 건 외부의 압력만이 아니라, 멈춤 자체를 두려워하는 내면의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는 거다. 한병철의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달리라고 명령하고, 파스칼의 인간은 조용함을 견디지 못해 달리고, 노자의 무위는 그 반대를 권한다. 힘을 빼고, 흐름을 따르고, 몸이 보내는 신호를 거스르지 않는 것.


달리기에서는 숨이 차오르면 먼저 호흡을 바꿔본다. 그래도 안 되면 속도를 줄인다. 삶에서도 같은 순서를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필요한 게 있다. 달리기에서는 속도를 스스로 정하지만, 삶에서는 속도가 외부에서 주어질 때가 많다. 그래서 호흡을 바꾸고, 속도를 줄이는 것만으로 부족할 수 있다. 때로는 달리고 있는 코스 자체를 바꿔야 한다. 어떤 트랙 위에서 뛰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순간이 필요하다. 하루에 한 번, 짧은 시간이라도 외부 신호를 차단하는 순간. 알림을 끄고 피드를 닫으면, 조용한 상태에서 비로소 지금 숨이 어떤지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몸이 무겁지는 않은지, 잠은 충분한지, 아침에 일어날 때 기분이 어땠는지. 이어폰을 뽑았던 그날, 처음으로 숨소리가 들렸던 것처럼. 그게 하루 5분이든 퇴근길 걷는 10분이든, 중요한 건 그 시간 동안은 외부 소음을 꺼놓는 거다.


그 상태에서 주황불이 보이기 시작한다. 삶에서의 주황불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잠을 줄이기 시작한다. 주말에도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사소한 일에 짜증이 올라온다. 좋아하던 것에 흥미가 사라진다. 빨간불처럼 극적이지 않아서 무시하기 쉽다. 하지만 달리기에서도 주황불은 조용히 온다. 숨이 아주 약간 가빠지는 정도다. 거기서 알아챌 수 있느냐가 갈린다.


주황불이 감지되면 먼저 호흡을 바꿔본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방식을 조정하는 거다. 우선순위를 다시 정리한다. 불필요한 일을 줄인다. 완벽하지 않아도 넘기는 연습을 한다. 달리기에서 속도를 유지한 채 숨쉬는 방식만 바꾸는 것과 같다.


그래도 숨이 돌아오지 않으면 속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프로젝트 하나를 미루거나, 약속 하나를 빼거나, 한 달만 강도를 낮추는 거다. 속도를 줄이는 건 포기가 아니라 전략이다. 달리기에서도 그랬다. 조금 줄이고, 숨을 고르고, 다시 달린다. 속도를 줄이는 걸 실패라고 생각하는 순간, 빨간불까지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빨간불이 왔을 때는 멈춘다. 달리기에서 빨간불이 오면 속도를 줄이는 정도가 아니라, 걷는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몸이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면 결국 멈추게 된다. 스스로 멈추든, 몸이 대신 멈추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아침이 왔다면, 그건 몸이 보내는 마지막 신호다. 거기서도 억지로 달리면 부상으로 이어진다. 달리기에서의 부상은 몇 주면 낫지만, 삶에서의 부상은 회복에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꼭 항상 숨이 차면 안 되는 건 아니다. 숨이 차는 순간이 있어야 성장한다. 인터벌 훈련처럼, 의도적으로 VT2를 넘기는 구간이 있어야 심폐 능력이 올라간다. 하지만 그건 회복 구간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회복 없이 VT2 위에서 계속 달리면 성장이 아니라 붕괴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을 때는 이미 빨간불이다. 오래 달리는 건 억지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몸이 보내는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데서 온다.


이제 이어폰을 잠시 뽑고 소리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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