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리더의 고민
"딸깍"
새하얀 사무실이 빨갛고 파란 작은 점멸등만 파닥파닥 거리는 어둠으로 덮였다.
"또각또각"
조용한 복도를 구두굽이 세차게 내려친다.
서로 손뼉 치듯 때리며 어둠을 갈라놓는다.
허 [Her] 실장은 처음 리더를 맡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혼자가 아닌 '팀원'과 일을 하게 되었다. 마음속으로 수천번을 시뮬레이션했던 리더와 팀원의 일과 관계 그리고 삶을 마주한 첫날은 참 의욕에 넘쳤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마지막으로 사무실의 불을 끄고 나가고 있었다.
이상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밤이었는데 그날따라 유독 밤하늘의 달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달을 보니 오래전 우연히 본 만화가 생각났다.
지구의 공간이 가득 차 죄수들을 달에 보내기로 했고 달을 가득 채우도록 감옥을 건설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많은 달 감옥을 죄수들은 탈출하지 못하고 영원히 갇혀있는 장면이었다.
왜 이런 장면이 떠올랐을까?
그날 오후,
"김파트장님, 지난번 실태조사 보고서 같이 봐야겠는데요. 미팅 초대 드렸으니 참석해 주세요"
"네 팀장님, 시간 맞춰 가겠습니다"
그녀는 부서에서 오래 일한 뼈가 굵은 팀원과 보고서를 같이 검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번 주 임원보고 미팅 전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벌써 일주일의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수요일, 보고서 상태를 보니 아침부터 마음이 커피포트 물 끓듯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보고서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이 뭐예요?
"네 팀장님, 사실 배경부터 말씀드려야 할 텐데요, 지금 이 업무는 사실 우리 부서에서 담당하고 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퇴사하신 서이사님께서 지시를 하시는 바람에 우리 부서일이 되어 버렸어요. 최선을 다해 정리를 하고는 있지만 우리 부서가 메인이 아니다 보니 제가 혼자 정리하는 게 역부족이에요."
"아... 파트장님, 제 질문은 보고서의 메시지예요. 배경이 아니라요."
"네, 결국 지금 이번 달 타겟을 못 맞췄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이번 달 타겟을 못 맞출 것 같으면 미리 손을 들고 알려야 조치를 취할 텐데 시간이 다 지난 뒤에 이렇게 통보하시면 어떡합니까. 앞서도 진행상황 여쭤봤을 때는 큰 이상은 없었다고 하셨어요."
"그게, 제가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럼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래프를 이해 못 하겠어요. 가로축과 세로축 설명도 없고요."
"아 가로축은 월이고 세로축은 실적입니다."
"그럼 타겟은 어디 있죠? 그리고 중간에 튀는 이 숫자는 무엇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 이유를 아시나요?"
"그건 확인해봐야 합니다. 곧 확인하겠습니다"
허실장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벌써 한 시간째 김파트장과 보고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었다. 보고서의 스토리라인을 다시 정리하기는커녕 김파트장과의 대화만으로도 너무 힘들었다.
"일단 됐어요. 이 데이터는 누구에게 받으신 거죠? 제가 그분과 직접 통화해 볼게요."
타닥타닥
분노의 키보드 소리가 울린다.
키보드가 사람이었으면 멍이 깨나 들었겠다.
'아.. 이럴 거면 내가 하는 게 낫겠어. 괜히 시간만 다 써버렸잖아. 이대로 보고서를 제출할 수도 없고. 업무 요청을 할 거면 앞으로 매일 모니터링을 해야겠어. 이게 뭔 폭탄인지'
그녀는 이곳저곳 주변 부서에 하나하나 연락하고 조각난 데이터들을 다시 정리했다.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리고 정기 미팅을 셋업 했다. 이번처럼 폭탄을 안기는 싫었다. 매일 진행현황을 체크하면 뭔가 변화가 있을 거라는 믿음과,
이대로 팀원에게 일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너무나 불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게 그녀의 직성에 맞았다.
'어휴, 늘 이렇게 내 손을 타야 한다니까, 내가 안 보면 되는 일이 없어'
겨우겨우 제출 기한을 맞춰 보고서를 제출했다.
메일함을 보니 안 읽은 메일들이 저마다 자기가 제일 급하고 바쁘다며 울어재끼고 있었다.
멍-
뭐부터 해야 하나
너무 많은 일들을 보니 어떤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오늘도 집에 일찍 가긴 글렀군'
북적이던 사무실이 조용할수록 그녀의 한숨은 깊게 울려 퍼진다.
캘린더를 보니 9시부터 6시까지, 점심시간까지 미팅이 들어차있다. 한 시간마다 하나이면 그나마 나을 지경. 2개 3개 미팅들이 중복으로 겹쳐져서 어떤 미팅을 들어가야 할지 판단하느라 머리에 과부하가 온다.
'이건, 내가 들어가야 답이 나올 거고
또 이 미팅은 내가 주최한 거고,
음 이 미팅은 정기 미팅인데 미룰까?'
안 맞는 퍼즐을 힘으로 눌러 맞추는 기분이 이런 걸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미루면 뭐 하나? 다음날은 또 새로운 미팅들이 생기는데?
묘한 무기력이 든다.
파트장들이 셋이나 되지만 미덥지가 않다.
회사에서 에이스로 불려 왔던 허실장이다. 보고서도, 의사소통도, 업무 능력도. 항상 속 시원하게 쳐내왔던 허실장은 일잘러로 승진한 케이스인 것이다.
'아 나도, 일잘러랑 일하면서 좀 신나게 일해보고 싶어. 티키타카 하면서 아이디어도 서로 이야기하고, 얼마나 재미있을까. 지금처럼 답답하지 않겠지?'
일은 줄지 않고 증식하는 습성이 있다. 혼자 맡으면 더더욱.
하나하나 손이 가는 게 많아지고 보면 볼수록 안 돌아가는 게 눈에 띈다.
메일을 다 쳐내지 못하고 찝찝한 상태로 집에 가기로 한다.
'아, 내일 3시에 분기 보고서도 나가기 전에 한번 더 봐야지, 김파트장이 수정사항 다 반영했으려나?'
두근두근
허실장의 뇌는 밤새 콩닥콩닥 돌아간다.
그녀는 책임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불안이라고 말한다.
다음날, 임원 보고
"허실장, 분기 보고서 숫자가 이상한데? 전월이랑 똑같아요"
"네, 그럴 리가요? 잠시만요"
"봐요 4월 숫자랑 5월 숫자랑 같아요. 이거 확인한 거 맞아요?"
"아, 착오가 있었습니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허실장, 요즘 이상해요. 정신이 나간 것 같아요. 요즘 일정도 너무 빡빡한 것 같은데 지금 업무 상태 체크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하루에 회의가 얼마나 있죠?"
"9시부터 6시까지.."
"그럼 생각은 언제 하죠?"
"네?"
허실장 님, 리더는 생각을 해야 해요. 리더의 시간 중 가장 알맹이를 생각하고 전략을 수립하는데 써야 해요.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성장시킬지 생각해야죠."
"시간이 너무 없어요."
"시간 관리 어떻게 하는 거죠?"
"아, 지금은 업무들이 너무 많고 제가 리뷰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어렵습니다."
"안 되겠네요. 허실장 다음 주까지 인사부와 확인해서 개선점 도출해 줘요"
허실장은 그날 잠을 잘 수 없었다.
치욕감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직장 생활 치욕감을 이렇게 갱신한다.
'아 너무 바빠서 김파트장 보고를 미쳐 꼼꼼히 검토 못한 게 실수였어. 어떻게 이걸 못 봤지? 뭐에 씌었나?'
삐-
언제부터인가 머리에서 소리가 난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제는 공기 같을 때도 있는데 또 종종 볼륨을 높여서 시끄러울 때도 있다.
볼륨이 커지는 날들이 잦아진다.
'쳇, 본인이 직접 해 보라지. 이게 말이 쉽나. 내가 손을 안 대면 다 펑크가 난다고. 어쩜 저렇게 무책임한 말을 내뱉을 수 있지? 내 사정도 모르고?'
'하나하나 확인 안 하면 욕먹고 당하는 건 나뿐이야, 이런 상황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어'
삐이이이이-삐이이이이
잠을 자고 일어났지만 밤새 생각하느라 뇌에서 김이 날 것 같은 상태로 그녀는 다시 사무실로 나선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한숨은 폐까지 끌어당겨서 뱉을 지경이다.
주간 임원 보고 미팅 시간이 돌아왔다. 어제 미팅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채 임원의 목소리를 한 시간 내내 듣는다.
갑자기 숨을 못 쉴 것 같은 복통이 찾아온다.
허실장은 회의시간에 아프다는 티도 낼 수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으.. 아.." 너무 아파서 입을 비집고 작은 고통의 소리가 새어 나온다. 다행히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어차피 다른 사람은 서로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오직 임원의 질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분주하게 두뇌를 풀가동 중이다. 회의실은 무게감 있고 차분하지만 허실장은 타 팀장들의 머리 돌리는 소리와 삐 소리로 인해 소음공해 속에 갇혀있다.
복통이 무엇인지 그녀는 안다. 급성 위경련
스트레스 상태가 심해지면 종종 찾아왔던 증상이다. 배를 주먹으로 맞은 것처럼, 그리고 누가 위를 움켜쥐고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이다.
드디어 한계가 온 것이다.
임원의 말과 말 사이 공간에서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것 같은 호흡을 느낀다.
매 순간순간 들숨과 날숨 사이로부터 칼이 날아와 허실장 가슴에 깊이깊이 박힌다.
허탈했다.
'무엇을 위해 일해왔단 말인가.'
좌절했다.
'나는 리더의 자격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평온한데 나만 힘든 건가'
허무했다
'해도 해도 안될 것 같아. 이 방식대로는 무리야'
다음날 아침, 누구의 메시지도 오지 않는 시간, 허실장은 컴퓨터를 열었다.
하고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회의와 정기, 비 주기적 보고들, 이벤트성 업무들 모두를 나열했다.
그리고 분류를 했다. 직장인답게 그래프를 뽑았다.
세상에, 업무의 70% 시간이 회의에 소모되고 있었다.
매일 겪는 일이지만 이렇게 그래프로 보니 남달랐다.
남이 뭐라고 하기 이전에 분명 문제가 있음이 명확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기엔 이유가 충분하지 않았다.
업무를 기록하며 일을 할 때의 감정도 추가했다. 그 일을 했을 때,
신이 나는가?
기가 빨리는가?
그냥 그런가?
세 가지 질문에 대하여 색상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처치 방법을 고안했다
안 해도 되는 일인가?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답이 명확히 나오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허실장도 모르게 허실장의 일과 삶, 그리고 위임에 대한 회로가 구동되기 시작했다.
이미 그래프로 충격을 먹은 뒤였기 때문에 변화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동의한 상태가 된 것이다.
기분 좋은 시작은 아니었으나, 도전과 고통을 나름의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몸부림쳤다.
"그래, 세상일을 내가 다 할 수 없어. 그건 자신감이 아닌 자기기만이었어.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인지하지 못한 거야.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할 수 없는 일은 과감히 놓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믿는 방법이었구나"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해내야만 한다는 생각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결의와 같은 것이란 것을 깨닫기 위해 건강과 수명을 지불했다.
허실장은 이제 믿기로 했다.
고통도 성장의 발판으로 만든 오늘의 허실장을,
그리고 그와 같은 잠재력이 있을 사람들을.
탁
허실장은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허실장의 집착과 불안도 꺼진 노트북처럼 덮어졌다.
오늘 정리한 리스트를 실행하려면 멈추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멈추고 내려놓는 연습,
이제 시작이다.
퇴근.
"삐-"
출출하여 계란을 살요량으로 들른 편의점에서 바코드 스캔하는 소리가 들린다.
허실장은 어느덧 허실장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삐 소리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다.
멈춤을 시작하는 허실장의 발걸음은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