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할까?

선택의 길목에서

by UNLEAD

‘어휴, 벌써 3시야?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간담? 지구 자전 속도가 빨라졌다는 뉴스 나온 거 아니야?‘

숨쉴틈 없이 지나간 하루, HER 실장은 화장실 갈 시간도 겨우 낼만큼 쫓기며 하루를 보낸다.



“허실장 님, 차 한잔 하시죠”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집중하던 허실장에게 회사 선배가 찾아왔다.

허실장보다 이 사업부에 먼저 들어온, 경력이 화려한 남자 선배다.

항상 깍듯하게 허실장을 존대하며 엉덩이를 붙이면 일어날 줄 모르는 허실장에게 새로운 공기를 주입해 주는 존재.

맥이 끊기는 것 같았지만 이대로 거북이처럼 등이 딱딱하게 굳어버릴 것 같은 느낌을 느꼈는지 순순히 선배를 따라나선다.


“A사업부의 김팀장 이야기 들었어요? “

”네? 김팀장이 왜요? 사업부장 노리고 한창 주가 올리고 있었잖아요”

“그렇죠, 근데 이번 달까지만 근무한대요.”

“헉, 왜죠? 사업부 넘버투라고 자타 공인하던 사람인데요?”

“다른 회사에서 좋은 오퍼가 들어왔대요. 자리도 팀장이 아닌 사업부장으로요.:

”와, 좋은 기회네요. 이일, 저일 사업부장님께서 곤란해하시던 일들 다 처리해 줘서 사업부장님이 쉽게 안 보내주실 것 같았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오래 일한 여기에서 새로운 곳으로 간다니 여간 큰 도전이 아니겠어요. 여기는 꽉 잡고 있었잖아요 “

”갈 사람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업부장 자리가 언제 날지도 모르고 순서 기다리다가 뒷방 노인네 될 수도 있죠. “


평소 친분이 없었던 김팀장이었지만 오다가다 인사는 종종 한 사이었다. 얼굴이 야망으로 가득 찬 남자. ‘나 사업부장 하러 여기 왔소’하고 얼굴에 써놓은 그런 사람.

’ 저렇게 대놓고 말하고 다녀도 되나?’ 허실장은 종종 이런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를 그렇게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티타임에서의 소식만큼은 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허실장을 잠시 꺼내놓기에 충분했다.


사실 야망으로 똘똘 뭉친 사람 중 하나가 허실장이었다. 허실장도 사업부장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맷돌에 콩을 갈듯이 자신의 몸을 갈갈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닿을 것 같으면서 닿지 않는 탄탈로스의 형벌처럼 목표는 늘 닿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에이스로 인정받았지만, 주위의 동료들은 하나 둘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허실장에게는 기회가 없는 것 같았다.

아주 잘 짜인 판에 돌들이 꽉 차있어서 하나의 돌이 나가야 다른 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판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놀이동산의 줄을 기다리는 기분이랄까?

언제쯤 갈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새치기가 언제 들어올지 몰라 조마조마한?

이미 맷돌에 갈려나가지만 더 더 더 갈지 못해서 못 올라가나 하는 죄책감에 시달릴 무렵 사업부장 자리를 위해 이직을 한다는 김팀장의 소식은 허실장에게 돌판의 빈자리를 찾지 않고 새로운 판으로 뛰어들 수도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퇴근길은 시끄러웠다.

허실장의 한쪽 목소리는

’ 안전지대에서 벗어나야지. 언제까지 여기서 일할 거야? 너 그러다가 다 털리고 남 좋은 일만 하게 될걸?‘

라고 떠들었고, 다른 목소리는

’ 여기서 해온 게 얼만큼인데. 사람들도 다 알고 인정도 받는다고. 새로운 곳에서는 사람들도 익혀야 하고, 시스템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데 실적을 만들긴 더 힘들걸? 그냥 여기서 밀고 나가. 그러면 기회가 올 거야’라고 주장한다.


두 목소리에는 교집합이 없다. 그저 자기 말만 반복한다.


일주일 전,

메일함에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헤드헌터 이사입니다”

링크드인에도 알림이 왔다.

새로운 포지션을 제안, 직급도 현재 직급보다 상급 자리였다.

‘내가 이 자리에 적합할까? 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를 의심이 소리 없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의심이 무럭무럭 자라 싹을 피우고 튼실한 줄기를 만들어오는 중 접한 김팀장의 이직 소식이었던 것이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처음 회사에 입사한 후부터 커리어 경로를 설계해 왔던 허실장이었다.

운 좋게도 그녀는 아직까지 계획대로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점프가 안되었다. 업그레이드가 아닌 옆그레이드만 하는 기분, 끝이 보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가는 기분이 든 건 3년 전부터였다.


삐비비비빅, 삐비비비빅

어머나 깜짝이야, 아침이었다.

배트맨 가면을 쓴 것 같은 다크서클이었다. 톡톡톡, 메이크업으로 애써 가려보며 출근하지만 오후가 되면 메이크업도 소용없어지겠지.

“실장님 오늘 어디 아프세요?”

걱정이 아닌 소린걸 안다. 얼굴에 퇴근길부터 시작해 새벽까지 이어진 생각의 전투가 벌어진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주말,

그녀는 주중의 부족한 잠을 충전하고 여유로운 시간 커피 한잔을 마시며 다시금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참 내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고 잘못된 선택을 해서 적응 못한 채 퇴사한 사람들도 있는데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생각의 무한 루프에서 허실장은 노트를 펼쳤다.

답이 안 나올 때 그녀는 손으로 줄줄 적어 내리곤 했다.

‘또 모르지, 내가 모르는 생각이 나올지도’


답답하다. 몇 년째 제자리를 돌고 있는 기분이다. 내가 성장하고 있는 걸까? 성장이란 무엇일까?

새로운 일을 경험해서 능력을 키우는 것일까?

나는 왜 성장하고 싶은 걸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승진은 성장일까? 일을 하면서 더 높은 자리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당연해서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구나 하는 생각 아닌가? 아니네, 직장생활에 회의를 가진 사람도 있고 퇴사해서 사업하는 사람도 있구나.

나는 왜 더 높은 자리에 가고 싶은 걸까? 멋있어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서? 잘 모르겠다.

그럼 나는 왜 답답한 걸까. 뭐가 잘 안 돼서 답답한 걸까?


벅벅

두줄이 그어진다.

'에라이 모르겠다. 직장 멀쩡하고 이 정도 경력이면 어디 가서 꿀리지도 않는데 뭐가 답답하단 거지?'

파도 파도 나오지 않고 깊숙이 숨어버리는 코딱지처럼 생각이 도망 다닌다.

그럼, 반대로 생각해 봐야겠다.

내가 힘이 나고 몰입했던 순간들은 언제였을까?

맑눈광으로 사무실을 쏘다니는 시절이 있었는데.

아 그때가 참 그립다. 지금은 왜 그 열정이, 몰입이, 밀도가 안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가장 최근에 비슷하게 갔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맞아.

우리 부서에 경력 신입이 입사해서 배우겠다고 달려들었을 때 퇴근시간 지나고 남아서까지 가르쳐줬잖아.

그때 진짜 내 목소리 정말 높아지고 신났었는데.

질문도 어쩜 그렇게 알차게 잘하던지. 한참 대답하고 보니 저녁 시간이 한 참 지나있었잖아.

맞아 맞아.

아, 그리고 여러 부서랑 공동 프로젝트 같이 진행할 때 잘 모르는 동료 도와준다고 주말에 통화하고 난리인적도 있었잖아. 와 그때 꿀팁 대 방출해 줬었는데 진짜 뿌듯했었어.

내가 이런 것도 알고 있다니 으쓱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네 그러네. 나 누군가랑 일할 때 즐거운 사람이었네

음 아니 아니, 항상은 아니야. 원수 같은 사람들하고 일할 땐 힘이 쫙 빠지잖아. 해골처럼..


일할 때도 도파민 쏵 돈 적이 있나?

아, 혼자 워크숍 할 때 있었다. 무슨, 미친 사람처럼.

이건 다른 사람들한텐 말할 수 없는 비밀이지 참. 회사 교육 지원할 때 혼자서 포스트잇 붙이고 기획하고 그랬었네. 그때 발표자료 제출했을 때 완전 복권 당첨될 것 같은 기분 좋은 확신 때문에 도파민 최고였어. 그리고 그 기획안 수정사항 1도 없이 바로 통과되었었잖아.

와 그 희열 말도 못 했지.


이상하다, 근데 그때 월급도 하나도 안 오르고 승진도 안 했는데?

인사고과 받을 때는 기억 안 나다가 도파민 돌 때는 아직도 어제일 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어떤 직급과 타이틀인 걸까?

지금 나에겐 1. 이직, 2. 이직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걸까?


머리가 복잡해진다.


잠시 펜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든다.

화면 가득 영상이 흐른다. 허실장이 팔로우하는 크리에이터들의 문구들에 마음이 사로잡힌다.

쓱 쓱 쓱

릴스를 휙휙 넘기다가 보고 넘기다가 보고 허실장의 눈이 화려한 움직임 속에 고정된다.

"많이 먹는 그 제품의 원재료?"

흥미가 생겨 영상을 끝까지 본다.

'이 사람은 참 대단해. 저렇게 스스로 공부하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꾸준히 공유해 주고 말이야. 신념이 굉장히 강한 것 같아. 그래도 행복해 보여. 눈에 찐 광기가 흐르잖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러워.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평소 인생관과 주관이 뚜렸다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람들을 많이 팔로우했던 허실장이었다.


문득 직장과 이직, 승진이라는 고민에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흐르는 러닝머신에 몸을 맡긴 채 방향 없이 달려가는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아니야, 그래도 내가 살아온 길에 의미가 있을 거야.

내가 눈이 빛 났을 때는 후배를 돕고 다른 부서 사람들을 도울 때 그리고 나만의 것을 만들어갈 때였어.

그때 실력이 점프했던 것 같아'

'근데 그렇다고 이 사람처럼 내가 당장 회사를 나와서 사업을 할 수도 없는 거잖아?'


허실장은 다시 펜을 들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하기

일을 시키는 관점이 아닌, 내가 어떤 걸 도와줘야 하는지의 관점으로 질문하기

팀원들이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알아보고 공유하기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주기


"휴-"

긴 호흡이 허실장 가슴에서 입으로 나왔다.

답인지 아닌지 모를 이야기들도 손에서 펜 끝으로 흘러나왔다.


생각은 머리로만 할 때는 빠져나올 수 없는 갑갑한 미로처럼 뻗어나간다.

그리고 자기 꼬리를 먹고 있는 뱀처럼 자기 생각을 먹으며 뱅뱅 돈다.

이 생각을 머리로 끄집어내면 뱀이 꼬리를 놓아주면서

제 갈길을 쉭쉭 찾아나간다.


허실장은 그때는 몰랐다.

허실장이 문을 연 제3의 선택지는 바로 “내적 동기를 발견하는 길”이라는 것을.


”먼저, 저에게 좋은 제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쉽게도 이번 제안은.. “




쓱쓱 하얀색 종이에 검은 선들이 연결된다.

노트를 덮은 허실장은 광속보다 빠른 주말과 이별하며 월요일 아침을 맞이한다.

“오늘은 일을 하러 가는 게 아니야. 도우러 가는 거야”

허실장은 그렇게 커리어의 지도를 다시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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