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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전멘토 박은정 Jul 14. 2023

전재산 2000만원 가지고 인도로 떠난 빠니보틀

나와 우리의 마흔 입성기 


여러분의 마흔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지금 행복 하신가요? 



 2022년 1월 30일 아빠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빠라고 했는데 저세상으로 가셨다고 해서 아버지라고 말하기도 어색하잖아요. 근데 아빠가 돌아가셨다 라고 갑자기 반존칭으로 말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네요. 어쨌든 아빠는 2022년 1월 30일 정확히는 1월 25일 언저리 즈음 돌아가셨습니다. 솔직히 정확히 언제 아빠의 숨이 멎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빠는 관리비에 인터넷, 전기세까지 포함되는 작은 원룸에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한달 전 12월, 18년간 요양원에 계시던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마주한게 마지막 얼굴입니다. 아빠의 형제 남매, 아무도 울지 않는 장례식장에 서울에서 늦게 도착한 아빠의 벌개진 눈동자를 보고 “울었어?” 하고 물었어요. 아빠는 멋쩍은 듯 “아니..” 그리고 저는 다시 먼저 집으로 돌아왔어요. 할머니의 장례식 첫째날이었지만 저는 그 다음날에 납품할 제품이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날이 오기까지 한 달 여간 두 번 통화했습니다. 한번은 아빠가 먼저 “할머니 부의금을 왜 이렇게 많이 했어? 고마워. 밥 한번 먹자. 아빠가 살게.” 두 번째는 제가 전화해 “설날에 밥먹게 우리 집으로 와.” 했더니 아빠는 풀은 죽은 목소리로 “알았어.”그럽니다. 제가 “왜 목소리에 힘이 없어? 무슨 일 있어?” 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아빠 회사 그만 뒀어. 계약만료 하루 전에 그만 나오래.” 그게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설날이 되었고 동생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아빠가 도착하기로 한 시간이 되었지만 아빠는 연락도 없습니다. 전화를 해보았더니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어색한 자동음이 들렸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남편과 동생을 데리고 같이 먹으려고 준비해둔 소고기를 식탁 위에 꺼내 둔 채 아빠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마음은 불안한데 신기하죠? 그날 새벽에 꾼 꿈이 생각이 났습니다. 까만 개미들이 집에 들어오고 저는 동그란 금이 박힌 돌을 줍는 꿈을 꾼 얘기를 남편에게 했어요.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둘 다 아무 말 하지 않았어요. 그 꿈이 아빠의 장례식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는 감히 예상 할 수 없었습니다.


아빠는 돌아가신지 5일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고, 저는 아빠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본 아빠의 원룸에는 엄청난 양의 빈 소주병이 있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어요. 마음이 이상했습니다. 아빠가 혼자 쓸쓸히 숨을 거둬 부패가 시작되고 있을 때 저는 회사일을 하고, 남편과 강원도 여행도 다녀왔어요. 아빠가 나와 같은 공기로 숨을 쉬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저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빠와 할머니의 장례식, 아빠의 실직, 엄청난 빈 소주병. 아빠의 마지막 말을 들을 순 없었지만 아빠와 관련된 저의 마지막 기억들은 아빠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을지 왠지 짐작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그렇게 장례식을 끝내고 아빠의 초라한 재산을 정리하고 일주일 뒤 저는 처음으로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저는 2015년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을 하기 전에는 감기 같은 작은 염증들이 항상 저를 힘들게 했었는데, 이상하게 사업을 시작하고부터 감기 한번 걸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회사 다닐 때는 뻔질나게 병가를 내고 연차, 월차를 내고 회사를 쉬었는데, 사업을 하다보니 아파야지만 그나마 마음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나 좀 아팠으면 좋겠다 생각 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걸리게 된 코로나는 저에게는 너무 좋은 해방구였습니다. 코로나에 걸려 강제로 2주간 쉬게 되면서 빠니보틀이란 여행 유튜버를 알게 되었습니다. 2주를 꼬박 강제 격리되어 빠니보틀의 세계여행을 정주행 하면서 저 또한 세계여행을 다녀온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괜찮은지 물어보는 남편의 질문에도 “어, 나 지금 인도여행중이야.” “나 지금 체르노빌 투어 하고 있어.” 하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만나게 된 빠니보틀과의 세계여행은 아빠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상실감, 사업의 피로감, 코로나의 목끝이 찡한 고통으로부터 저를 멀리 떨어져 있게 도와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의 2022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으로도 마흔이 되던 해였습니다.


 

폭풍 같은 마흔의 시작, 작년 한해 저에게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아빠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마흔은 지금까지 사업의 성공, 확장, 투자유치, 남들보다 더 잘나가는 모습 같은 외형적인 것만을 쫒던 저에게 앞으로의 나의 진짜 삶에 대해 질문 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아파야지만 마음 편히 쉴 수 있어 어딘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제가 정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빠니보틀을 처음 알게된 그때에도 빠니보틀은 이미 몇십만 구독자를 거느린 유명 유튜버 였습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난 지금은 170여만의 구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 인기 유튜버로 성장 되어 있습니다. 삼십대에 실직자가 된 빠니보틀이 처음 유튜브를 시작한 것은 전재산 2000만원을 가지고 1년 동안 세계여행을 하겠다는 무모한 도전으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물론 이전 여행경험으로 인해 이미 여행 전문가 수준의 경험을 갖춘 빠니보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삼십대라는 나이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로를 정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고 전 재산을 가지고 세계여행을 떠난다는 계획은 누가 봐도 무모해 보였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때의 그보다도 더 나이 많은 마흔 한살입니다. 어느 날 내 안의 내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정말 지금 처럼과 같이 또 20년을 계속 살 수 있어?” 또 다른 내 안의 내가 곧바로 대답했습니다. 아니 대답 하기도 전에 고통이 밀려 왔습니다. 숨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아니, 이렇게 살다간 나 정말 죽을 것 같아.” 다시 물음이 들렸습니다. “그럼 정말 니가 원하는게 뭐야?” 진로를 정해야 했던 삼십대의 불안한 빠니보틀과 다르지 않은 마흔한살의 내가 여기 있습니다.


2015년 5월 30일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마지막 짐을 차에 싣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가던 차안의 공기와 냄새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40살이 되던 2022년 남편과 저는 소위 말하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영종도에 작은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2015년 희망과 설렘을 가지고 달리던 차안의 저는 40살이 되어도 제 명의 집하나 가지지 못하고 만성불안증에 시달리는 외로운 사업가가 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달려왔었을까요?


다시 빠니보틀의 2000만원이 생각나네요.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덕에 남아있는 통장잔고는 이제 제가 가진 경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2000만원의 종잣돈으로 떠난 인도여행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여행유튜버로 성장한 빠니보틀과 같이 저는 저의 경험이란 종잣돈을 가지고 저의 앞으로의 10년을 위한 새로운 여행 계획을 세워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마흔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지금 행복 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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