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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닝, 이념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한 남자

by 방구석 정치




1. 한 이념가의 탄생: 글로 권력을 설계하다

왕후닝은 상하이 푸단대 출신의 정치학 교수로, 정치·외교·경제 등 실무 경험은 전무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의 세 지도자,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을 모두 보좌한 전략가로 활약하며, 중국 권력 핵심부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시진핑 체제에 이르러서는 단순한 이념 설계자를 넘어 중국 최고 권력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르며 실질적인 권력자로 변모했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조언이나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시진핑 체제의 통치 이념과 국가 전략의 근간이 되었고, 이는 글의 힘으로 권력을 설계하고 행사한 보기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2. 시진핑과 왕후닝: 영화의 주인공과 감독의 관계

시진핑은 강력한 권력을 추구했고, 왕후닝은 그 권력을 이념적으로 정당화할 철학과 언어를 제공했다.
왕후닝은 ‘중국몽’, ‘시진핑 사상’, ‘공동부유’, ‘3연임 정당화’ 등 시진핑 체제를 이념적으로 정교하게 설계하며, 두 사람은 권력자와 이념가의 긴밀한 공생 관계를 형성했다.
그는 마치 영화의 주인공을 위해 연출과 각본을 맡는 감독처럼, 시진핑의 절대 권력을 하나의 통치 서사로 구성하고 포장한 연출자였다.
왕후닝은 푸단대 교수 시절부터 서구의 쇠퇴와 중국의 부상을 주제로 오랜 연구를 해왔으며,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와 강력한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글들을 다수 발표했다. 이러한 그의 세계관은 시진핑 시대의 통치 이념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3. 중국몽이 중국을 질식시키다

2012년, 시진핑이 당 총서기로 취임한 직후 내건 대표적 슬로건이 바로 ‘중국몽(中國夢)’이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구호로 구체화된 이 개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왕후닝이 설계한 사상적 틀 위에서 탄생한 정치적 메시지였다.

왕후닝은 과거 미국을 방문한 경험을 통해 자유주의의 내부 모순과 약점을 관찰했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식 체제가 서구를 능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의 통제, 민주주의보다는 일당 체제의 효율성에 주목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상된 중국몽은 강력한 국가, 조화로운 사회, 민족의 부흥을 내세웠고, 시진핑은 이를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중국몽은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적 통제와 민족주의적 동원을 기반으로 한 국가주의 프로젝트였다. 개인보다 집단, 자유보다 질서, 시장보다 계획을 우선시하는 이 모델은 당초의 ‘부흥’이라는 슬로건과 달리, 현실에서는 다음과 같은 역효과를 낳았다.

자유의 억압: 공산당 체제 유지를 위해 언론, 표현, 종교, 학문 등 전방위적 통제가 강화되었다.

창의성의 소멸: 사상의 자유가 억압되면서 혁신과 창의력이 줄고, 젊은 세대는 모험보다 복종을 택하게 되었다.

청년 세대의 절망: 치솟는 취업난, 과도한 경쟁, 사회 통제로 인해 청년층은 ‘불투(躺平, 드러눕기)’ 현상으로 대표되는 무기력에 빠졌다.

기업의 위축: 알리바바, 텐센트 등 민간 기업들에 대한 강력한 규제는 기업가 정신을 꺾고 경제 활력을 둔화시켰다.

이처럼 중국몽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한 채, 국가주의적 동원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려다 오히려 사회 전체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결국 이는 마오 시대의 오류를 반복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오늘날 중국 사회는 부흥이 아닌 질식의 구조에 갇히고 있다.


4. 소리 없는 침략으로 다른 국가들을 황폐화시키다

왕후닝은 총칼보다 심리전과 정보전이 더 강력하다고 믿었다. 그는 가짜뉴스, 여론 조작, 내부 분열 유도 등 민주주의의 허점을 파고드는 전략을 강조했다. 특히 자유사회에서는 표현의 자유와 다원성이라는 장점이 오히려 외부의 심리전과 정보전에 취약한 틈이 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왕후닝은 이러한 틈을 이용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전략을 체계적으로 설계했다.

‘일대일로’ 역시 단순한 경제협력이 아니라, 주변국을 빚더미에 앉혀 중국에 의존하게 만들고, 인프라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지리적·경제적 주권을 잠식하는 침략 전략이었다. 이는 무력 없이 이루어지는 신형 제국주의의 전형이었고, 왕후닝은 이를 통해 중국몽을 세계로 확장하고자 했다.

이러한 전략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부정선거 개입 의혹은 그 대표적 사례로, 중국은 정보전을 통해 선거 여론을 조작하거나, 특정 정파에 유리한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선거관리기관과 언론에 대한 침묵과 외면은 국민들 사이에 불신을 키웠고,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의 공정성 자체를 위협했다. 또 친중 성향 세력이 민주주의 체제 내부에서 오히려 중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행태는 심리전이 얼마나 깊숙이 침투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왕후닝의 전략은 단지 외국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직접적인 내정 간섭과 체제전쟁의 실천이었다.


5. 시진핑 실각설과 왕후닝의 운명

왕후닝이 설계한 전략은 당초 중국의 자신감을 고취시키며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 기여했다. ‘중국몽’을 앞세운 국가주의 프로젝트는 내부적으로는 강한 통제를, 외부적으로는 경제적·이념적 영향력 확장을 시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전략은 오히려 중국의 숨통을 조이고 주변국에 깊은 상처를 남기며, 역풍을 맞기 시작했다.

강압적 통치와 정보전, 일방적인 외교 전략은 주변국의 반발을 불러왔고, 일대일로에 참여했던 국가들은 채무 부담과 주권 침해로 고통을 겪었다. 내부적으로는 청년 실업, 창의성의 위축, 민간기업의 쇠퇴, 민심 이반 등 활력이 급격히 사라졌으며, 외교적으로는 미국과의 기술 전쟁, 서방과의 가치 충돌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하게 되었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는 결국 시진핑 실각설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제 하강, 민심 악화, 당내 불만이 커지는 상황에서 시진핑의 장기집권이 위태로워지고 있으며, 그와 운명을 함께해온 왕후닝 역시 안전하지 않다.

왕후닝은 실무 경험이나 정치 파벌 없이, 오직 사상과 이념 설계만으로 권력 핵심에 진입한 특이한 인물이다. 그런 만큼 체제의 성공이 아닌 실패의 책임이 부각되는 순간, 가장 먼저 정치적 희생양이 될 수 있다.
그가 설계한 통치 철학이 중국을 압박하고, 세계와의 충돌을 심화시켰다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시진핑이 퇴진하든 권력이 재편되든, 왕후닝의 운명 또한 그 뒤를 따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

6. 결론: 한 사람의 생각이 세계를 흔들 때

왕후닝은 사상으로 권력을 설계했고, 그 권력은 중국은 물론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이념은 내부를 억누르고 외부를 자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중국과 국제 질서를 모두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그의 전략이 중국의 국가 정책으로 실현되면서, 한국 역시 여론 조작, 선거 개입 의혹, 정치적 분열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는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닌, 민주주의 체제를 내부에서부터 흔드는 ‘총 없는 전쟁’이었다. 국민 개개인이 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경계심을 갖지 않는다면, 자유는 조용히 무너질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중국 공산당의 전략을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우리 체제와 생존을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단호하게 대응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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