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빌 언덕에 대해
결국 사람이 하는 일
앞의 글을 통해 회사에서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겠다고 말했지만 이는 과도하게 가까워져서 서로를 다치게 하는 관계를 조심하겠다는 말이고, 사실 적당한 거리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회사 일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일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 그 자체인데 오늘은 혜진언니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원하던 회사에 입사해서 기뻐하던 것도 잠시, 곧장 나는 내 밥값의 무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회사가 일하는 법을 친절히 가르쳐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내던지듯 정글에 바로 던져 놓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입사 첫 날 팀장님께서 어떡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 큰 프로젝트를 내가 리드해야 한다고 해 나는 어리벙벙할 뿐이었다. 몇 날 며칠을 고심해서 팀장님께 결과를 보고 하면 팀장님은 피드백 대신 “내가 뭘 해주면 돼요?”라고 역으로 물어 나를 또 얼어붙게 했다. 또 어느 날은 미팅에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다음 미팅부터는 들어올 필요 없어요.”라고 하기도 했다. 그 당시 나는 회사에 나의 쓸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내가 가르칠 만한 가능성이 있는지, 미팅에 참석할 필요가 있는지, 이만큼의 월급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등등, 회사가 내놓는 모든 테스트에 낙방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야근을 하며 시간을 쏟는 것뿐이었고 그 긴 시간만큼 괴로워했다.
나의 비빌 언덕
그 때 내 옆을 지켜주었던 이가 혜진언니였다. 1년 선배였는데 그 당시 나의 어떤 점을 예쁘게 봐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언니도 일이 많아 야근을 하는 와중에도 “우리 같이 해결책을 찾아보자.”라며 내 일까지 함께 봐주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쭈뼛거리며 다가가는 나에게 언니는 늘 “회의실로 갈까?”하며 언니의 뭉텅이 시간을 숭덩 잘라 내게 내주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은 회의실에서 그리고 저녁 7시부터 그 날의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 싶은 시간까지 언니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주었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를 두서없이 말하면, 언니는 화이트보드에 내가 겪는 문제를 하나씩 적으며, “혹시 네 생각은 이런 건가?” 하며 되짚어주었다. 혜진언니가 싱가폴로 발령 나기 전까지 몇 개월간 팀장님과의 미팅 시뮬레이션, 영어 미팅 준비, 내 보고서에 대한 피드백 등등 그렇게 다양한 고민들을 함께 해주었다. 언니는 그 당시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고, 유일한 비빌 언덕이었다.
언니 덕분에 힘든 회사 생활에 조금은 숨통이 트였었다. 사실 회사 생활 자체가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팀장님은 단 한번도 우리의 시뮬레이션대로 움직인 적 없었고, 밤새 준비해서 하나의 과제를 끝내기 무섭게 또 새로운 과제가 주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언니가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든 아니든을 떠나서, 내가 그 시기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무조건 ‘너를 믿으니까’ 라는 말로 옆에 있어주던 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가 회사에서 버텨야 하는 이유가 한 회사 3년은 다녀야 하니까, 그냥 대책없이 그만두면 다음 취업이 어려우니까, 처럼, ‘해야만 하는 이유’ 뿐이었는데, 혜진언니를 만난 이후로는 언니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으니까 처럼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이유’가 생겼다. 혜진언니가 싱가폴로 가고 나서는, 언니가 나를 도와준 노력이 허망하지 않게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는 버텨야지, 언니가 다시 한국 지사로 왔을 때 잘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또 버텼다.
내가 그 시기를 어떻게 버텼나 되돌아 보면, 혜진언니라는 비빌 언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힘든 일도 많고 부침도 있겠지만 그럴 때 사람을 버티게 하는 것은 자신을 한없이 믿어주는 존재 덕분이라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다. 사람은 그저 몸 하나 딱 기댈 수 있는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혜진언니가 내게 그 비결을 몸소 가르쳐줬다.
시간은 흐르고
덕분에 그 곳에서 버티던 몇 달이 3년이 되었고, 힘들어서 떠나는 퇴사가 아니라 또다른 성장을 위해 떠나는 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버티는 시기가 지나고 나자 어느 순간 새로 눈을 뜬 것처럼 그동안 내가 무엇이 문제였고, 일은 어떻게 접근해야하는지 등 예전의 상황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참고로 새로 눈을 뜬 듯 일하는 법을 깨닫게 된 내용은 아래 퍼블리 글에 정리해두었다.
https://publy.co/set/1508?referrer=s6nmt1
잊고 살았던 이야기
이제 내가 팀장의 자리에 선 후, 예전의 나와 계속 마주치게 된다. 막상 팀장이 되고 나니 회사는 지독하게 숫자로만 이루어진 조직이라서, 내 팀원들마저도 매출목표를 가는데 도움이 되는 친구, 아닌 친구처럼 매번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게 만든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잘하고 있던 팀원들까지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여유를 부릴 수 없다고만 생각했었다. 힘들어서 퇴사하겠다고 말하는 팀원을 보면서, 다른 회사에 가도 아직은 일하는 법을 몰라서 힘들 텐데. 조금만 더 버티며 일하는 법을 깨우치고 떠나면 좋을 텐데 처럼 개안했던 순간만 기억하느라 내가 언덕에 기대서 겨우 숨쉬던 시간은 잊고 잊었다. 나는 혜진언니가 몸소 보여준 인생의 비결을 잊고 살았구나 싶다. 당근과 채찍, 그 보다 앞서 필요한 것은 비빌 언덕이었다고.
이제 복귀를 앞두고서 다시 지난 회사 생활을 돌아본다.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그 곳에서는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