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가요?
요새 마음이 편해졌다는 생각을 하다, 그 이유 중 9할 정도는 브랜드 마케팅 일로 돌아온 것 때문이지 않을까 했다. 그러다 1월쯤 잠 못 이루던 밤이 떠올랐다. 이번에 브랜드 마케터로 이직 준비를 했지만, 그로스마케팅 직무로도 면접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해온 그로스마케팅 일을 구조화해서 설명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그 시간도 나름 즐거워 면접이 끝난 직후에는 그로스마케팅을 다시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무서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무엇이 두려웠나 생각해 보면 다시 그로스마케팅을 선택해 괴로웠던 지난 3년을 반복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스스로에게 속지 않으려, 브랜드 마케팅과 그로스 마케팅의 차이에 대해 정리해두려 한다. 그 차이가 무엇이길래 내가 똑같은 마케터 타이틀을 달고 일하면서도, 어떤 때는 물 만난 고기처럼 즐겁게 일하고, 어떤 때는 마치 수영 선수가 마라톤을 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그래서 그로스마케터 채용공고가 점점 느는 현실에서 왜 브랜드 마케터라는 본진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정리해두려 한다.
인티그레이션 대표님이 이런 말을 하기는 했다. 마케터라면, 그래서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무슨 영역이다 (퍼포먼스 마케터다, 콘텐츠 마케터다 등등) 나누지 말고, 그냥 필요한 모든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틀린 말 하나 없고 공감도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사고방식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도 지금은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지만, 이후 브랜드의 큰 방향성이 모두 얼라인되고 세부 조정을 통해서 브랜드의 매출액을 키워야 하는 단계가 오면, 다시 그로스 마케팅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 코어가 무엇인지 인지하는 것은 중요하니, 변명 같지만 이 글을 남겨놓는다.
3년 전 그로스 마케터 직무로 이직할 때를 돌이켜보면, 어느 회사를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했지만, 내 직무가 브랜드 마케팅에서 그로스 마케팅으로 바뀐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크게 고민하지 못했다. 그로스마케팅은 새롭게 생겨난 직무였고, 그래서 지금 그로스마케터로 일하는 사람들은 다들 브랜드/ 퍼포먼스/CRM 마케터 출신이었고, 그래서 나 역시 그들이 하듯 그로스마케팅 일로 전환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비즈니스 문제를 숫자로 이해하는데 강점이 있던 터라, 그로스 마케팅을 하면 숫자 강점을 더 강화하고,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CRM 쪽까지 보완할 수 있겠다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입사 첫날, 그간의 비즈니스 리뷰 문서들을 읽어보면서 큰일 났다는 생각을 했다. ‘와 겁도 없이 남의 전장에 들어왔네’ 이런 느낌이랄까. 분명 지난 9년간 숫자를 기반으로 로지컬 씽킹을 해왔는데 왜 나는 그로스마케팅이 힘들었나 돌이켜보면, 사고방식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로스마케팅은 정답 (최적의 해)을 찾는 일이고, 브랜드 마케팅은 질문을 정의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로스 마케팅에서는 빠르게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브랜드 마케팅에서는 문제를 정의하고 방향을 세우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은 질문을 정의하는 사람이었다.
수도관을 고치는 엔지니어, 그로스 마케터
먼저 그로스 마케팅 정의부터 보자면, 누군가는 문제를 풀기 위해 모든 것을 하는 마케팅, 그래서 Paid와 CRM을 모두 할 수 있는 마케팅이다, 숫자 감각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마케팅이다 등 새롭게 생겨난 직무인 만큼 여러 정의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로스마케팅이란 문제 변수를 정량화하고, 가설에 따라 변수값을 바꿔냄으로써 즉각적인 개선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로스 마케팅을 하면서 마치 정비공이 된 느낌이었다. 정비공이라는 표현이 불편하다면 엔지니어랄까. 수도관의 물이 어디에서 새는지 알기 위해, 모든 옵션을 고려하고, 가능성 높은 것부터 하나씩 적용하며 물이 새는 지점을 찾아야 했다. 가설을 세우고, 이를 어떻게 검증할지, 성공을 어떻게 정의할지, 실패했을 때 어떻게 다시 돌아갈지, 매일 수도관의 부분 부분을 보면서 세부 조정해 나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빠르게 가능한 모든 가설 옵션을 떠올리고, 즉각적으로 실험해 나가는 사고 루프가 중요했다. 그런데 나는 그 모든 옵션을 떠올리는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았고, 에너지가 많이 들었다. 매니저의 피드백을 받으면 “아, 이런 옵션도 있구나”하며 곧잘 이해는 했지만, 스스로 그 가설들을 만들어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구분하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숙련도 문제라기보다 내가 문제를 다루는 방식과 관련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이 어려우면서도, ‘이게 맞나?’라는 물음표가 자주 생기곤 했다. ‘왜 이 수도관을 고쳐야 하는지’, ‘이 방식이 물은 잘 흐르게 하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위험하지는 않은지’ 등 그로스 마케팅 관점에서는 불필요한 질문이 늘 들었다. 예를 들어 장기 미방문자를 다시 방문시키기 위한 과제를 수행할 때도 데이터에 기반했을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할인이나 인플루언서 같은 트리거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도 ‘할인이나 인플루언서 트리거로 방문한 유저를 정말 다시 데려왔다고 판단해도 되는지’ 같은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건물을 짓는 설계자, 브랜드 마케터
이와 반대로 브랜드 마케팅은 수도관 고치기보다 건물을 짓는 일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왜 이 건물을 만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건물에 가게를 짓는다면 고객은 왜 많고 많은 가게 중에 우리 가게를 와야 하는지, 고객이 우리 가게를 어떤 가게로 인지하게 할 것인지 이런 질문과 맞닿아있었다. 그래서 브랜드 마케팅은 맥락을 중심으로 우리 브랜드를 어떻게 만들어나갈지 전략을 짜고, 그 과정에서 데이터를 단서로 활용했다.
브랜드마케팅은 우리 브랜드의 지향점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니, 조금은 불확실하더라도 우리의 지향점을 우직하게 끌고 가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로스마케팅은 즉각적으로 이 일이 맞는지/틀렸는지를 판단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브랜드의 맥락과 이유를 충분히 탐색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 브랜드마케팅적으로 이 브랜드를 어떻게 키워나갈지를 생각하면 그 방향이 너무 재미있고 설레는데, 이 브랜드의 정비공이 되어 지금 눈앞의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야 하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혔다. 그래서 ‘숫자와 퍼널 중심으로 빠른 실행’을 지속적으로 요구받는 환경에서는 내 강점이 잘 작동하지 않았다.
혹은 귀납적/연역적 사고의 차이일까 라는 생각도 했다. 그로스마케터로 일 잘한다 평가받는 사람들은 연역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데이터가 없더라도 로지컬 씽킹에 기반해 가설을 세우고 하나씩 검증해 나가는 일을 했다. 그리고 빠른 실험과 반복적 조정을 통해 얻어낸 데이터를 가지고 그 가설이 맞는지 여부를 빠르게 파악했다. 그런데 나는 직접 고객의 소리를 듣고 시장의 반응을 축적해 나가는 사람이었다. 내게 데이터는 가설 검증 도구가 아니라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였다. 나는 가설을 세우려면 먼저 경험을 해야 하는 귀납적인 사람이라, 연역적으로 가설을 설계하고 검증하는 일이 어려웠나 싶기도 했다. 내게 가설은 추측이 아니라 발견에 가까웠다.
<그렇게 진짜 마케터가 된다> 책에서, 마케터의 일은 브랜드의 현황(as is)을 이해하고, 목표 (to be)를 정의해, 목표로 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 (what needs to be true)을 하는 일이라고 정의했지만, 직무의 프레임에 따라서 목표를 정의하고 목표로 가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방식이 마케터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마케팅이라는 큰 범위에서 다양한 세부 직무에 따라 비즈니스를 바라보는 뷰가 달랐다. 그래서 그동안은 내가 general 한 강점이 있는, 그냥 무엇이 되었든 비즈니스 문제를 푸는 마케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장/단이 명확한 마케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강점은 0 → 1 builder
그래서 이번에 이직을 준비하면서 나의 강점이 무엇일까 깊게 고민했고, 나는 데이터에 기반해서 브랜드의 지향점과 문제를 명확히 이해하고 이를 매출액 같은 결과물로 만드는데 강점이 있었다. 그리고 브랜드 마케팅, 퍼포먼스 마케팅, 제품 등 마케팅의 큰 범위를 전방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보니,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방향성과 숫자를 연결하는 능력, full funnel 강점이 있었다. 내가 물 만난 고기처럼 일하던 때를 돌이켜보면, 초기 마케팅팀을 빌드업하면서 데이터에 기반해서 우리 브랜드의 지향점을 세우고 마케팅 활동을 구조화하는 일, 그리고 이걸 매출화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해 보면, 0 → 1 builder라는 강점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무언가를 정해야 하는 상황 혹은 당장의 매출액은 나오고 있지만 브랜드 방향성이 정리되지 않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내 강점이 100% 발휘되는 것 같았다.
이와 반대로 마케팅팀이 고도화/세분화되어 브랜드 마케팅/ 그로스 마케팅 등으로 팀이 나뉘고, 그로스 마케팅 안에서도 유입, 리텐션 등 퍼널별로 쪼갠 다음 내게 유입을 맡으라고 하면 내 강점이 전혀 살지 못했다. ‘이 부분에 집중해서 세부 지표를 개선하세요’라는 가이드 하에서는 강점이 살지 않았다.
그래서 내 강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1) 작은 조직에서 마케팅팀을 키우거나 2) 이미 세분화된 큰 회사를 간다면 브랜드 마케팅을 가야겠다고 정리했다. 더 나아가 마케터로서의 커리어골을 그려본다면 브랜드의 지향점을 정의해 나가는 브랜드 디렉터 혹은 마케팅팀을 새로 만들거나 재정비가 필요한 곳에 용병처럼 투입되는 마케팅 팀장으로 나아가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1월의 잠 못 이루던 날 밤, 붙어도 가지 말자고 나를 다독인 후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성향적으로는 브랜드 마케터가 맞지만, 그간 다양한 마케팅 영역을 경험해 오느라 아예 브랜드 마케팅만 해온 사람 대비해서는 브랜드 마케팅 경험이 약할 수 있어, 이번에는 브랜드 마케팅, upper funnel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브랜드 마케터로, 브랜드 지향점을 세워야 하는 회사에 합류했다. 한 달 정도 시간이 지나고 있는데, 고객의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잠재 고객은 왜 우리 브랜드를 쓰지 않는지, 어디서 그 니즈를 해소하고 있는지, 구매를 생각하면 무엇이 걸리는지 등 문제를 정리했다. 그리고 우리 브랜드의 다양한 서브 브랜드 간의 역할을 정의하고, 키 메시지와 그걸 뒷받침하는 이유들을 찾고 있는데,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내 강점을 발휘하고 있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고,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날도 있지만 마음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스마케팅의 프레임을 이해하고 있는 상태에서 브랜드 마케팅을 할 때 내 강점이 극대화되는 것도 느낀다. 생각해 보면 브랜드는 맥락이고 그로스는 매커니즘이어서, 건물 짓는 사람 입장에서 수도관의 원리를 아는 것이 더 튼튼한 건물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걸 느끼고 있다. 고객이 어디에서 이탈하는지, 어떤 지점에서 반응하는지를 데이터로 이해한 경험은 브랜드의 방향을 세울 때 훨씬 구체적인 판단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11년 마케터 커리어를 돌이켜 봤을 때, 초반 1년 퍼포먼스 마케팅을 경험한 것이 내 여러 자산 중 하나가 됐다. 초반에 퍼포먼스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후 IT 기반으로, full funnel로 숫자를 만들어나갈 때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케터라면 뭘 하든 숫자로 비즈니스를 볼 수 있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다시금 생각하고 있고, 퍼포먼스든 그로스든 내 최초 강점과 조금 거리가 있던 일을 하던 당시는 괴롭기는 했어도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똑같은 마케터라도 자신의 강점이 다르고 이에 따라 자신이 걸어야 하는 길이 모두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빠른 실험과 조정 과정에서 결괏값이 실시간으로 바뀌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며, 아 다르고 어 다르다며 메시지를 고민하는 브랜드 마케팅이 오히려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답답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의 강점을 잘 살릴 수 있는 곳에서 일할 수 있기를,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할 때 즐겁고 괴로운지 잘 돌아보면 좋겠다. 그럼에도 나와 맞지 않는 세부 직무에서 고생했던 경험이 나중에는 무조건적인 도움이 되기는 하니, 혹 괴로운 상황이라면 내가 무얼 얻기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생각해 봐도 좋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당분간 브랜드 마케팅이라는 언어로 일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