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직무 찾기 과정 1. 한 기숙사의 236호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라는 것’만 알 때의 기록이다. 내가 마케터라는 직무를 알게 되기까지의 기록을 남겨두면, 자신에게 맞는 직무를 찾고 계신 분들께 도움이 될까 싶어 글을 남기고 싶어졌다.
그리고 ‘마케터’라는 업으로 일 한지 8년 차가 되었는데, 어딘가에 소속되어 마케팅하는 것의 그다음은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 고민이 생겨나고 있어서, 마케터라는 직무를 알게 되고 하고 싶어 했던 때의 기록을 남겨두면, 내 업에 대한 중간점검으로 이만한 게 없겠다는 생각 또한 들어 글을 남기고 싶어졌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마케터라는 직무가 무엇인지 몰랐다. '마케터'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거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보니 내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직무 자체는, 조선소 사업이 발달하다 보니 보게 되는 현장직 업무, 그리고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무직 업무, 그리고 학교에서 보는 선생님, 자영업, 그리고 미디어 등에서 노출되던 직업들 뿐일 만큼 내 세상은 작았다. 그 해 어떤 드라마가 유행했는지에 따라 다음 해 그 과의 커트라인이 바뀌던 것을 보면 다들 이렇게 작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허준 드라마가 유행하면 그다음 해 한의대 경쟁률이 높아지고, 어떤 때는 호텔리어 경쟁률이 높아지는 것들. 우리가 업에 대해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적어서이지 않을까.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의 크기만큼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다. 그때는 일반 회사에 입사한다는 것이 사무실에 앉아서 일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일반 회사에 다양한 직무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것 같다. 회사라는 곳도 다양한 종류의 회사가 있고, 그 회사를 굴러가게 하는 데에는 다양한 직무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이해가 없었다는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회사를 다녀본 적 없는 친구가 어느 날은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직장 생활을 좀 해보고 싶은데, 사람 뽑는 공모전 어디 있어?”
흔히 아침 드라마를 보면, 여성 주인공이 공모전에서 수상해서 대기업 마케팅팀에 입사해서 본부장과 연애하게 되는 그 레퍼토리가 그 친구가 알던 회사 생활의 전부인 것이다. 그런 공모전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나이와 연차와 상관없이 자신의 세계를 깨는 일은 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각자가 다른 세상을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내가 알고 있던 세상 속에서 나와 가장 잘 맞다고 판단했던 직업은 교사였다. 무언가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을 즐겨하고 곧잘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강점들 중 일부일 뿐이고, 그보다 더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걸 찾을 기회가 없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직후의 나는 무슨 과를 가야 내 강점을 찾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고, 딸의 경력단절을 미리부터 고민하던 엄마의 영향을 받아 한 지방의 교대를 가게 되었다.
그래도 두 달은 꽤 재미있었다. 더 이상 고등학생도 아니고, 부모님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며 술을 늦게까지 마셔도 된다는 사실에 꽤 신났던 두 달을 보냈다. 중간중간에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괴리감을 겪기도 했다. 고3 때 대학교에 가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나는 공부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당시는 그것이 뭔지 모르고 어려운 공부, 깊은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마케터가 되어서 매일 하는 비즈니스 고민이 내가 원했던 어려운 고민이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 실컷 하고 있다.) 교대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키우기 위해 수업이 단소 불기, 펭귄춤 추기, 수영 수업, 그림 그리기처럼 모든 분야를 넓고 얕게 배우는데, 나는 뭔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을 너무 하고 싶었다. 지금 배우는 것들이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의 똑같은 복도를 몇십 년간 왔다 갔다 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 어려운 공부가 무엇인지도 당연히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학원을 다닐까 생각도 했다. 무슨 공부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영어공부라도 해볼까.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공부일까. 대학생이라고 신분은 바뀌었지만 하는 고민, 가지고 있는 생각 자체는 고등학생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런 갈증에 동기에게 영어학원을 다니자고 했더니, 동기의 답은 '임용고시에 영어점수가 가산점이 들어가냐'는 답이었다. 나는 그저 배우고 싶었을 뿐인데, 이곳은 선생님이 되는 것 자체가 큰 목표인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해 5월 4일. 교대는 매년 어린이날에 아이들을 초대해, 페이스 페인팅도 해주고 풍선도 불어주고 아이들을 위한 하루를 선물한다. 내가 선생님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내일 어린이날에 또 얼마나 내가 지칠지가 보여 멍하니 앉아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고등학생 때 논술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녔던 거제는 사교육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학교 차원에서 서울의 논술 선생님을 모셔와 수업을 제공하곤 했는데, 고3 때 나를 맡았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첫마디는 대뜸 '너 왜 서울에 없냐?'였다. 수능 점수가 높지는 않았어도, 논술은 잘하는 편이라 수시를 노리면 서울은 문제없다고 나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미 지방에 있고, 벌어진 일이니까. 선생님은 반수를 하라 했다. 그러고서는 반수는 부모님도 모르게 하는 거니까, 그냥 학교 다니면서 몰래 하라고.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전화를 받던 상황과 전화 내용은 생생하다. 그전까지는 자신이 없어 수능을 다시 친다는 옵션은 전혀 없었는데, 이렇게 괴리감에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뭔들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라며, 그전에 없던 용기가 생겼다.
내 인생을 바꾼 여러 순간들이 있지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순간을 짚어보자면 그 전화를 받은 후부터 1년 간인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일단 모르겠고, 교대와 같은 특수대가 아니라, 일반대라고 불리는 곳을 가자라는 생각뿐이었다. 교대는 배우는 커리큘럼 자체도 교사를 키우기 위한 내용만 배우니까, 나중에 내가 다른 것을 하고 싶다고 해도, 가령 일반 기업에 입사하고 싶다고 해도, 졸업한 학교를 기입할 때 코드조차 없다고 했다.
'수능 다시 쳐서 일반대로 가자'라는 생각만 가지고, 준비를 시작했다. '수시 입학 인원이 심리학과 0명, 경영학과 00명.' 내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경영학과가 무엇을 배우는지도 모르겠지만 제일 많이 뽑아서, 그냥 무조건 일반대로 옮긴다는 생각으로 경영학과에 지원을 목표로 했다.
내 브런치 주소도 그렇고 카카오 프로필 메시지도 그렇고, 236이란 숫자를 자주 쓴다. 내 인생 가장 강렬한 기억 중 하나에 대해.
그때의 나는 거짓말처럼 나의 모든 것을 쏟아냈던 것 같다. 교대는 20명 정도 인원으로 반이 구성되어 4년 동안 같은 시간표에 같은 수업을 듣게 된다. 그래서 4년의 시간 동안 동고동락하다 보니, 말 그대로 수저가 몇 개 인지 모두가 다 알고, 소문도 쉽게 퍼진다. 내가 반수를 한다는 사실은 아마 재미있는 소문 거리가 될 터였다. 그렇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반수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내가 지내던 기숙사는 236호였다. 236호는 기숙사 방이기도 했지만, 학원이기도 했고, 교대에서 유일하게 괴리감에 내가 괴롭지 않은 공간이었다. 지금도 눈앞에 생생한 236호 문패를 열면 고군분투하는 스무 살의 내가 있을 것만 같다.
엄마 아빠도 몰래 하던 반수다 보니, 인강 대신 고3 때는 잘 보지도 않았던 ebs가 유일한 방법이었다. 혹시 동기가 내 방에 놀러 올까 봐, 수능특강 문제집을 사도 표지가 보이지 않게 책꽂이에 거꾸로 꽂아놓았다.
가끔 기숙사 생활을 하던 동기와 밤 산책을 나섰는데, 그때의 보름달이 떠오르다. 그때 우리는 의미 없는 대화들을 나누며 밤공기를 만끽하고 있었는데, 그때 동기는 나이키 운동화가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내가 바로 들었던 생각은,
나는 나이키 운동화도 필요 없고, 억만금도 필요 없고, 그냥 어려운 공부를 하고 싶다. 이곳을 떠나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다.
살면서 처음 만나는,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던 첫 번째 과제였다. 누구도 대신 풀어줄 수 없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노력하기로 마음먹으면 ost 하나가 깔리고 꽃이 피고 녹음이 짙어졌다 낙엽이 지고 눈이 오는 배경에서 시간이 훅훅 흐르고 그 당일이 되어버린다. 내게 그 1년의 시기가 그랬다.
서울에 있는 대학들에 수시 지원을 했고, 오전 10시에 있는 논술 시험을 치기 위해 새벽 5시쯤 있던 ktx 첫차를 타야 했다. 그 당시 기숙사는 학생의 안전 목적이라며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바깥에서 문을 잠가놓았었다. ktx를 타기 위해, 자취하는 친구에게 내일 놀러 가야 하는데 하루만 재워달라고 부탁하고 새벽 첫 차를 타러 걷는 대구의 새벽은 참 추웠다. 그렇게 동대구역에 도착하면 엄마와 함께 서울로 시험 치러 가는 학생들 모습이 보였다. 엄마가 춥지 않으냐고 자녀들의 목도리를 여며주기도 하고, 따뜻한 물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내 고 3 때의 모습이 생각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서울역에 내려서 시험이 열리는 신촌, 안암 등지로 가다 보면 늘 시간에 쫓겨 달리기 일수였다. 지하철역에서부터 학교 건물까지 쉼 없이 달리고, 연대에서의 논술시험은 도서관 5층인가 6층에서 쳤는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가 없어서 급히 계단을 오르던 날도 생각난다. 경비아저씨가 어서 달리라며 응원도 해주고, 숨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바로 논술 문제를 풀던 그때가 생각난다.
수능은 하루 수업을 째고, 동기들에게는 그냥 미용실 할인이나 받아보려고 수능 친다고 하며 내 노력을 우습게 말하기도 했다.
그때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던 것 같다. 수시를 치러가서 고 3 때처럼 학교 구경도 하지 않았고, (학교를 구경하는 시간도 내게는 사치였고, 내가 합격해서 다니는 게 아니라 구경하는 건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오늘'을 살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어느 때보다 '오늘'을 살기는 했지만, 어느 때보다 '오늘의 나'를 버리기도 했었다. 나는 그때의 스무 살의 대구가 어땠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게 수시가 마무리되고, 수능까지 다 치고 났을 때의 내 마음은 "떨어져도 상관없다."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처럼 그냥 이렇게 '오늘만 살아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았던 것'이 처음이었고,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안 되는 거면 그냥 내 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제는 내게 주어진 길을 잘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떨어져도 후회가 없어서 이제는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대학 결과 발표날, 합격을 확인하고 엉엉 울었다. 그동안 가수들이 대상을 타거나, 수상을 할 때 우는 모습을 보면 이해를 하지 못했었는데, 내 모든 걸 쏟아내고서야 왜 우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때의 시간들이 보상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냈고, 더 이상 미련이 없는 해탈의 순간까지 왔는데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무언가 주어졌을 때, 그동안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그제야 내가 정말 힘들었었구나 그냥 고생했다고 너 힘들었던 것 다 알고 있었다고 누군가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것 같은 느낌에 눈물이 왈칵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교대는 자퇴를 하게 됐고, 원하는 학교로 진학하면서 내가 앞으로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던 것을 제외하는 것으로, 그렇게 내 직무를 찾기 위한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스무 살 그때의 기억은 가장 빛났던 시기지만, 내게 깊은 상흔처럼 영광의 상처를 남겼던 시기이기도 하다. 스무 살 당시의 내가 꽤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남아서 내가 나태해질 때마다 "너 이러려고 서울 왔어?"라는 질문을 꽤 오랫동안 남겼던 것 같다.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인턴도 해보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그때의 내가 왜 그렇게 좁은 세상에 갇혀 있었는지를 뒤늦게 생각해보곤 한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았던 것. 책을 읽더라도 ‘수능 점수 최대화’라는 목적에 맞춰서, 문학 소설 등만 읽었던 것. 그리고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해보지 못했던 것. (근데 그런 이야기가 많은 것도 아니니, 나부터라도 내 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남겨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뽑는 인원이 많다는 이유로 경영학과를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아찔해지기까지 한다. '더 많은 경험을 해볼 것'이라는 생각만 들뿐이다.
직무라는 것이 그 직무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명확하게 잘 보이지만 바깥에서 아직 진입하기 전에 있는 사람에게는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내 업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느끼는 바를 많이 기록해두자고 다짐해본다.
다음 글에서는 경영학과에 와서 마케터라는 직무를 알게 된 이야기를 남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