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정답을 원하지 않는다.

by 고양이수의사


"독서도 역시 소통하면서 읽어야 돼.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혼자서 계속 읽으면 관념의 기둥만 남아요."


황석영 작가는 '이혜성의 1% 북클럽'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감옥에서 몇천 권의 책을 읽었다는 사람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책 속의 생각에 갇혀 사람은 사라지고 관념이나 이상 같은 것들만 남는 아이러니.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2017년 다니던 병원을 퇴사하고 개원 준비를 하던 중 뜻하지 않게 2년을 쉬게 되었다. 병원 자리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1년을 놀았는데 농구를 하다가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1년을 더 날리게 된 것이다.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 선배의 권유로 고양이 행동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재밌어서 나는 행동학 공부에 금세 빠져들었다. 여러 전공 서적을 읽고 국제 고양이 학회의 행동학 심화 과정을 수강하기도 했다. 내 머릿속에는 꽤 많은 행동학적 지식이 채워졌고 마침내 고양이 병원을 개원한 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거기까지만 좋았다.






공부한 바에 따르면 많은 보호자들이 고양이를 올바르게 돌보지 않고 있었다. 고양이에게 꼭 필요한 환경 요소를 제대로 갖추지도 않고 그렇다고 잘 놀아주는 것도 아닌 나쁜 보호자들이 너무 많았다. 고양이들이 얼마나 힘들까. 나는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나는 머릿속에 '가상의 적'을 만들었고 늘 그들과 쉐도우 복싱을 했다.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나는 진료 하나하나에 전력투구를 했다. 개원 초기에는 예약이 없는 날도 많았기 때문에 진료가 한 건이라도 잡히면 비장한 각오를 다지곤 했다. 벼르던 진료에 들어가면 불필요한 정보를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선배에게 이런 얘기를 전해 들었을까.


"그 선생님은 그렇게 진료해서는 힘들어서 병원 오래 못할 것 같은데?"


게다가 그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걸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걸. 나는 꽤 오랫동안 불친절한 친절을 퍼부었다.


우리 병원에 처음 방문하면 초진 차트를 작성하게 되는데 그것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사료를 얼마나 먹이는지, 매일 사냥 놀이를 얼마나 해주는지, 어떤 모래를 쓰는지, 접종은 주기적으로 하는지 등 모두 중요한 단서들이라 거기서 힌트를 얻을 때가 많다.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을 안내해 주기에도 좋다.


그런데 나는 그 좋은 도구를 보호자 잡도리하는데 썼다. 보호자와 처음으로 교감을 쌓아야 하는 그 귀중한 기회를 지적질하는데 소모하고 말았다. 각자의 현실적인 부분을 충분히 고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입바른 소리만 하기 바빴다. 이건 이렇게 바꿔야 하고 저건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잘못된 것만 눈에 보였다. 그들이 고양이를 괴롭히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왜 상대방의 표정이 굳어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많은 걸 공부해서 알려주는데 고마워해야 하지 않아? 나만의 세상에 갇혀서 급하게 쌓아 올린 지식의 기둥은 혼자서 고고히 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보호자의 반응을 살피기 바빴다. 그들이 내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내 기분은 널뛰었다. 상대는 잠시 고민하는 것뿐인데 무표정으로 있으면 나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화가 났다. 나 혼자서 평정심을 잃고 상대를 자꾸 설득하려 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기도 했다. 그들이 나한테 뭘 바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좋은 걸 알려주는 데도 받아들이질 않다니.


사실 나는 모두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내가 하는 말이 그들에게 귀한 것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정답을 알려주는 것만으로 인정을 얻을 수는 없었다. 누구도 그것을 원치 않았다.


'너는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잖아.'


시간이 꽤 지나고 깨달았지만 고양이를 데리고 힘들게 병원에 온 보호자들이 원하는 것은 공감이었다. 그건 까다로운 다른 생명체들과 살아가며 겪는 인간만의 고충, 그리고 그들이 갑자기 떠나버릴까 봐 느끼는 두려움을 나누고픈 마음이었다. 어찌 보면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공감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공감이라는 말은 참으로 막연하다. 누군가는 상대가 느끼는 걸 나도 똑같이 느낀다는 의미로 쓴다. 또 다른 누구에게는 '너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내가 받아줄게'라는 표현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공감임에는 틀림없다.


서로의 사정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왠지 모를 짠함을 주고받는 것. 그게 내가 힘들게 배운 공감이다. 함께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시간. 내가 쌓아 올렸던 지식의 기둥을 써먹을 순간은 그때서야 온다.


나는 이제 진료실에서 고양이도 보고 사람도 본다. 고양이 뒤에 숨기 바빴던 내가 그들에게 공감해 보려 애쓴다. 그들에게 지금의 상황이 최선이라면 나는 거기에 맞게 정답을 찾아주려 한다. 무신경한 의사들이 하는, 감기 환자에게 찬바람 쐬지 말라는 얘기나, 건선 심한 손으로 물 만지지 말라는 식의 무책임한 얘기는 덜 하려고 노력한다.


고양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는 집사의 마음은 모두 같을 거라 여기며 그들을 대한다. 그들이 고양이를 이동 가방에 겨우겨우 넣는 모습, 우는 고양이를 어르고 달래며 병원을 향하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최선의 도움을 그들에게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지식의 기둥을 쌓고 또 쌓는다. 그들에게 정답과 위안을 동시에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