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은 후기 | <이랑고랑>
2023 겨울 코엑스홀에서 열리는 서울 일러스트 페어를 다녀왔다.
내가 간 날은 2일 차, 금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주말처럼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행사장의 모습에 조금 기가 많이 빨리기도 했다. (주말에는 그럼 얼마나 사람이 많은 거야?)
각 부스마다 작가님의 스토리와 그림 속 대상의 스토리가 어울려져 무엇하나 쉽게 지나가긴 어려웠지만 그중 개인적으로 큰 울림을 준 어느 한 부스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L32 부스를 채우고 있는 단체의 이름은 <이랑고랑>, 시골 마을에 사시는 할머님들의 그림과 향기, 그리고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부스에 뒤편에는 작품에 참여하신 할머님께서 그림을 그리시고 있는 듯해 보였다.(인스타 스토리를 보니 그분이 안나 할머님인 것 같다.)
아무래도 젊은 작가들이 주를 이루는 서일페에서 할머님들의 투박하면서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지는 그림들은 단번에 시선을 잡기에 충분했다. 자연스레 발걸임이 부스 앞에 머무니, 부스에서 일하시는 스태프분이 열심히 홍보를 하시고 계셨다.
(그분이 뿌려준 향수 뭍은 종이... 너무 좋았는데 왜 사질 않았을까? 지금 와서 많이 후회된다.)
특히 오랫동안 내 시선이 머무른 건 할머님들이 필름 카메라로 본인들의 주변 환경을 촬영한 사진 묶음이었다. 스태프분은 사진이 랜덤으로 들어가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듣자 이미 살 것이라는 회로에 갇힌 나는 어떤 묶음 고를지 상당히 신중해졌다.
문제는 거스름 돈이었다.
현금만 쓰겠다는 생각하고 덜컥 5만원권을 가져가 버린 것이다. 조심스럽게 5만원권을 내밀자, 약간 당황하신 눈빛이 보여 1차 죄송스러웠고, 할머님 지갑에 있는 거스름돈까지 더해도 금액이 충족되지 않아서 2차 죄송스러웠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무릎 팍 꿇고 사과하고 싶었다. 진짜로
그래서 내 나름의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이 일을 해결하고자 했다.
바로 금액이 충족될 만큼 더 사는 것. 랜덤으로 들어있는 필름카메라 사진 묶음을 더 구매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전혀 손해 보는 기분이 아니었다.
기뻐하시는 스탭분과 직접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고맙다고 해주시는 할머님 덕분에 덤으로 소중한 추억까지 얻어간 셈이다. 그 손길이 묘하게 친할머니가 생각나기도 했고......
부스를 어느 정도 돌아보고 점심을 먹으려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갔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수확한 일러스트를 찬찬히 흝어보다가 <이랑고랑> 부스에서 산 필름 카메라 묶음을 풀어봤다.
내가 갈 수 없는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의 풍경, 그것도 할머님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사물의 분위기와 감정을 느끼고 있으니 산골 마을에 위치한 우리네 외가댁에 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또 사진을 어찌나 잘 찍으시는지, 집에 돌아와서 방 벽에 붙일 사진을 고르는데 한참 걸렸다는 후일담이 있다.
<이랑고랑>은 유튜브 채널과 인스타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엔 그간 할머님들의 예술활동이 남아있는데, 그 장르도 연극, 그림 등 일러스트에 얽매여 있지 않아서 다채로운 편이다. 뭔가 보다 보면 다큐멘터리를 틀어놓은 기분이라 요즘엔 취침 전 asmr로 틀어놓기도 한다. 할머님들이 사는 곳 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이랑고랑>이라는 공간은 새로운 정겨움을 준다. 이번 서일페 최고의 수확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