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결혼 후 처음 이사를 하면서 불필요한 짐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는 안 보는 책, 더 이상 손길이 가지 않는 옷 등 짐이 될 뿐인 물건들을 버리다가 시집올 때 가져온 일기장을 발견했다.
딱히 일기라고도 할 수 없는, 그날그날의 기분이나 있었던 일과 내 감정 등을 대여섯 문장, 길어야 열 문장 정도로 간략하게 적어놓은 일종의 수첩이었다. 그 수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나는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짜증, 속상, 슬픈이라는 단어가 제법 들어있는 문장들은 20대 시절 불안정하다고 여겼던 내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변변치 못한 직장, 아무것도 없는 학벌, 낮은 자존감,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똘똘 뭉쳐서 '그래도 용케 꿋꿋하게 지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저 장점이라곤 젊음 하나뿐이었던 그 시절에 왜 그리 불안감에 절어 조바심을 냈을까.
나는 수첩을 읽어 내려가다가 부정적이고 나빠 보이는 감정이 가득한 수첩에서 그 안 좋은 기운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아 꼴 보기가 싫었다.
나는 끔찍하다고도 느껴지는 그 낡은 검은색 가죽 표지의 수첩들이 보기 싫어서 없애 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망설일 순간도 없이 3권의 두툼한 수첩을 잘게 찢어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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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문득 그 수첩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최소한 현실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내가 무슨 기운이 들었는지 아련한 옛일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다. 그때 필체는 어땠지? 젊은 날의 내 사고방식은 지금과는 달랐을까?
백 프로 부정적이기만 했나.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고 느꼈던 소감, 지금 안 적어 놓으면 이 소중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잊힐까 부지런히 적어놨던 내 감정들.
강산이 두 번 바뀔 오래전 이날에 땡글땡글하고 통통한 볼을 가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무모하게 찢어버린 그 일기장이 갑자기 궁금해서 속이 타들어갔다. 처음부터 아예 일기 같은 것을 쓰지도 않았으면 현재의 속상함도 없었을 텐데. 어설프게 기억이 난다는 것은 참 속이 상하는 일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인지 그 시절 힘든 기억을 다시 더듬어 스스로 치유하겠다는 그럴듯한 핑계인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내 블로그의 가장 오래전 게시글은 17년 전에 업로드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줄 빵을 만들며 열심히 찍었던 사진 속엔 반죽을 주무르고 있는, 지금보다 더 매끈한 30대의 내 손이 보였다.
이제라도 열심히 써볼까.
30대, 40대, 50대 시절을 간직하면 내가 70살 혹은 그 이상의 나이가 되었을 때 편하게 오래전 감정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길 수 있겠지. 좋은 일이던 부정적인 일이던 나에겐 그저 소중한 일상이었기에.
그냥 쓰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