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분의 눈에 절대 띄어서는 안 되었다. 이 기다란 줄의 맨 앞에 서서 우리들과 마주 보고 있는 그분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조금 답답했지만 나는 꾹 참았다. 그분이 좋아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툭하면 화를 내고 손찌검은 기본에다 접두사 '썅'이 붙는 욕을 서슴없이 하는 그의 기분을 파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하는 욕을 선생님도 잘했다. 엄마랑 비슷한 욕을 하는 그 사람을 나는 편하다고 여겨야 하나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에게는 익숙한 접두사 '썅'이 들어간 욕이 익숙하지 않은 친구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자라온 환경이 좋다 해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욕의 범위를 넓히게 해 줄 거친 친구가 주변에 한둘 있을 수도 있었다. 아직 10년 조금 더 산 우리에게는 욕의 다양성에 대해 경험하기란 무리였다. 그런 여린 친구라고 생각되는 몇몇 아이들을 보며 나처럼 약간은 거친 환경에서 자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순둥이 아이들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햇빛은 강렬해서 눈을 뜨고 있기가 쉽지 않았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앞 친구의 검은 뒤통수가 내 시야를 가렸다.
운동장에는 다른 반도 수업을 하고 있어서 조금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선생님이 뭐라고 소리를 치는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똑바르게 줄 서기를 하는 시간이었음에도 나는 그분의 동태를 확인하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말았다. 선을 넘고 만 것이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고 선생님 쪽을 바라보았다. 더위에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과 마주쳤다. 학생들에게 구령을 외칠 때마다 제대로 처리가 안된 침은 입 가장자리에 거품처럼 고여있었다.
수업 중에도 고여있는 거품 때문에 종종 속이 울렁거렸다. 그 거품에서 눈을 떼고 싶지만 수업 중에는 그 분과 눈을 마주치고 있어야 했다. 선생님의 충혈된 눈을 보면 내 눈도 그렇게 될 거 같아 겁이 났다. 나는 생각했다. 말할 때 입술 가장자리에 침이 많이 고이는 사람은 말하는 직업을 택하면 안 되겠다고. 속으로 우웩 하며 기울였던 고개를 원래대로 돌리려고 했다. 이지수 나와!라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부지런히 앞쪽으로 나갔다. 선생님은 내가 다가가자 나의 뺨을 때렸다.
다시 돌아와서 줄을 서고는 내 앞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검은 뒤통수에 시선을 꽂았다. 줄에서 벗어나면 레이저 광선에 노출되어 삐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얼음이 되어있던 나는 다시 선생님께 달려가서 '이제는 선생님이 안 보여요' 하고 말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조금 전 맞았던 한쪽 볼이 아직 열기가 식지 않아 다시 가기가 겁이 났다. 선생님이 안 보이도록 앞 친구의 뒤통수에 더욱 집중하니까 선생님은 다음 동작을 구령했다.
화면이 밝아지자 아이가 나타났다. 아이는 방금 혼이 나서 주눅이 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특별히 내성적일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아이는 축구를 한다고 했다. 축구 연습 때문에 귀가가 늦어지니까 늦은 시간이 더 편하다고 했다. 아이의 시선은 정면에서 약간 비껴있었다. 화면을 가운데 두고 나와 마주 앉아 있는 아이는 나를 무척 어려워하는 듯했다. 말을 많이 더듬다가 뭔가를 물어보며 네? 네? 하며 나로 하여금 꼭 한번 더 물어보도록 만들었다.
"선생님이 물어보면 바로 대답하려고 하지 말고 무엇을 물어봤는지 생각하고 천천히 대답하세요."
입 양옆에 침을 고이며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말을 하던 선생님은 성격이 꽤 급하셨던 것으로 기억난다. 국민학교 선생님을 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락부락한 생김새의 욕쟁이 아저씨가 어쩌다가 꼬맹이들을 상대하는 직업을 택했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환경에 의해 사람이 변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체험한 적이 있었다. 건설회사 현장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내 인생에 알고 있는 모든 욕을 그 회사를 다니면서 배웠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급여일이 되었다. 현장에서 일을 하는 건설 노동자들은 사무실로 몰려와 급여와 관련하여 시시비비를 따지며 욕을 해댔다. 이런 세상도 다 있나 싶을 정도였다. 이 정도 환경에서 일을 한다면 욕 따위의 더러운 소리에 노출되는 고통도 돈으로 환산하여 보상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욕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비속어가 섞인 발언을 할 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랫입술을 깨물고 심각한 분위기에 도취된 척을 했다. 나는 그제야 회사에서 필요한 업무보다 욕을 배우러 이곳에 왔구나 느꼈다. 현장을 지도하는 신입 사원은 순둥순둥한 햇병아리였다.
'쟤네들이 나중에 저렇게 되는 거구나.'
나는 내 또래의 남자 신입사원들과 입이 꽤나 거친 경력 15년 이상 된 중년의 과장님을 번갈아보며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욕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그런 선생님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숙제였다.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아 학교에 가기가 싫었다. 엄마는 오전 수업만 받고 조퇴를 하고 오라고 했다. 그 이후에는 엄마와 병원에 가는 것으로 그날의 일정은 정해졌다. 나는 말연습을 했다.
[선생님, 제가 오늘 몸이 좀 아파서요, 엄마가 조퇴를 하고 오라고 했어요.]
이 정도 하면 상대 어른에게서 알맞은 응답이 들려올 것이다. 그러면 그 응답에 맞춰 나도 대답을 하고 인사를 하고 책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오면 만사오케이였다.
점심시간이 되어 아이들은 책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책상 사이를 지나 선생님께 다가갔다. 점심을 드시려는지 선생님도 가방에서 뭔가를 뒤적거렸다. 나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다음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제가 도시락을 안 싸왔거든요.]
[본론만 얘기해, 본론만]
여전히 뒤돌아서서 무언가를 달그락거리고 있는 그리고 본론만 듣고 싶어 하는 선생님을 위해 나는 본론만 얘기했다.
[엄마가 조퇴를 하래요.]
본론만 얘기하라는 재촉에 [왜냐면 제가 몸이 좀 아파서요, 그래서 엄마가 조퇴를 하라고 하셨어요. 오후에 병원에 가기로 했거든요.] 이 말은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결론적으로 도시락을 안 싸와서 조퇴를 하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물론 선생님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시는 눈치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저 조퇴하고 싶습니다]라고 했으면 더욱 만사형통이었다. 왜 조퇴하는지는 묻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특별히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있어서 그들의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어른이라는 생명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들과 말을 오래도록 섞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그들은 나를 아주 숫기가 없고 지나치게 내성적인 아이로 판단했다. 사실 어른과는 무슨 말을 해야 알맞은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어른과 할 얘기가 이 세상에 있기는 할까 궁금했다. 그러다가 내가 만만하다고 느끼는, 이를 테면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는 만만한 동네 아주머니에게는 오히려 맹랑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내가 나이가 들고 보니 나이라는 것은 그냥 세월이 흘러서 자연히 먹게 된 것이었다. 화면 속에서 엄마보다도 약간 더 윗세대인 나에게 조곤조곤 잡다한 이야기를 해주는 어린 회원을 보며 '나도 저렇게 하면 예쁨 받았을 텐데....' 하며 예의와는 상관없는 나의 숫기 없던 모습을 아쉬워했다.
오늘도 축구 연습을 하고 왔다는 아이는 내가 뺨을 한 대 맞고 다시 줄에 선 모습처럼 잔뜩 얼어 있었다. 당연히 딴짓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선을 약간 떨군 채 빨리 대답하려고 서두르다가 말이 꼬이고 더듬기를 반복했다. 나는 아이들과 친해지는 방법 중 하나로 근황을 물어보곤 한다. 방의 모양이 바뀌었다거나 머리 스타일이 바뀌면 얘기를 꺼내기가 쉬워진다. 그 아이는 새로운 근황을 물어보기가 편했다. 어느 날은 손에 깁스를 하고 있거나 또 어느 날은 눈에 안대를 하고 나타나기도 하며 항상 새로운 부위가 다치고 다친 부위를 붕대로 감싸고 있었다. 화면에 아이가 나타나면 나의 첫마디는 "어머! 괜찮아?"가 되었다. 다리에 깁스를 한 모습은 볼 수가 없으니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아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나는 눈치를 채지 못할 것이다. '본론만'이라는 말은 나쁜 뜻은 전혀 없는 단어임에도 불편함을 주는 단어가 되었다. 대답 외에는 잡다한 말도 거의 하지 않는 저 축구소년에게는 어차피 쓸 일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