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 수집의 기술
작가로 살면서 제가 얻은 소중한 습관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망설임 없이 메모를 고르겠습니다. 메모 습관 하나가 제 글쓰기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기 때문이죠.
메모를 시작하기 전에는 매번 글을 쓸 때마다 머리를 쥐어짜야만 했습니다. 메모를 시작한 뒤로는 노트에 적어놓은 내용 중에서 고르기만 하면 됐습니다. '쥐어짜는' 글쓰기에서 '고르는' 글쓰기로 바뀐 겁니다.
메모는 대체 무엇을 어떻게 남기는 걸까요. 일기처럼 길게 쓰기도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단어 하나만 적어두면 나중에 무슨 뜻이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헤매다 결국 메모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 많습니다.
첫째, 감정이 움직인 순간을 붙잡습니다. 메모의 기준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하루 중에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움직인 순간이 있었다면, 그게 메모거리입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낯선 사람의 표정을 보고 잠깐 멈칫했다면 그건 메모거리입니다. 점심 메뉴를 고르다가 문득 엄마가 해주던 배춧국이 떠올랐다면 그것도 메모거리입니다. 퇴근길에 본 하늘 색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면 그것도 메모거리입니다.
마음이 움직인 모든 순간은 글 씨앗이 됩니다. 그 움직임이 작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작은 씨앗일수록 잘 자라는 경우 많습니다.
둘째, 짧게 남기되 상황을 함께 적습니다. 메모가 부담스러워지는 이유는 완결된 문장을 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메모는 완결된 글이 아닙니다. 나중에 내가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단서일 뿐입니다.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다만 단어 하나만 적으면 나중에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으니까, 상황을 살짝 붙여줍니다. '노을'이라는 단어만 적어두면 나중에 봤을 때 무슨 뜻이었는지 모릅니다. 대신 이렇게 적어둡니다.
'퇴근길 버스 창밖 노을, 엄마 생각'
이 짧은 메모 하나면 나중에 한 편의 글로 확장할 수 있는 기억이 살아납니다. 한 줄 안에 언제, 어디서, 어떤 감정이었는지만 담으면 됩니다.
셋째, 들은 말을 따로 모읍니다. 다른 사람이 한 말 중에 내 마음에 걸린 문장이 있으면 그대로 적어둡니다. 친구의 푸념, 할머니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 택시 기사의 한탄. 이런 말들은 나중에 글에서 생생함을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내가 만든 문장과 실제로 들은 말은 다릅니다. 실제 들은 말에는 삶의 결이 묻어 있어서 글에 현실감을 더해줍니다. 나는 나의 경험 안에서 생각하고 말합니다. 타인은 나와는 전혀 다른 경험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지요. 그래서, 타인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글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무조건 다 받아적을 필요 없습니다. 상대가 하는 말 중에서 썩 괜찮다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 하는 말,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말.... 이런 것들을 메모해두면, 나중에 글 쓸 때 큰 도움 됩니다.
넷째, 이미지와 단어를 섞어서 기록합니다. 글쓰기 메모라고 해서 꼭 글로만 남길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면 스마트폰 사진으로 찍어둡니다. 그리고 그 사진 옆에 한두 줄 느낌을 적어둡니다.
사진만 있으면 나중에 무슨 감정이었는지 흐려지고, 글만 있으면 장면이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둘을 함께 기록해두면 기억이 선명하게 보존됩니다. 요즘은 메모 앱이 잘되어 있어서 이 작업이 어렵지 않습니다.
글 쓰는 건 어렵고 힘들지만, 사진 찍고 메모하는 건 유쾌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그렇게 사진과 짧은 글을 모아두면, 나중에 글 쓸 때 지난 시간 떠올리기가 한결 수월합니다.
다섯째, 질문을 적어둡니다. 하루를 살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왜 나는 유독 이 장면에서 마음이 흔들릴까. 사람들은 왜 헤어질 때 이런 말을 자주 할까. 아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자기 감정을 숨기기 시작할까.
이런 질문들은 그냥 흘려보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메모장에 적어두면 훗날 한 편의 글이 됩니다. 답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답은 글을 쓰면서 찾으면 됩니다. 좋은 글은 대개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특히, 독서 과정에서 빈 여백에 적어두는 질문들은 사색과 철학과 신념과 가치관 등 다양한 성찰과 발전에 도움 됩니다. 타인의 생각과 주장을 펼쳐낸 글에 나의 질문을 더해 더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이죠.
메모 도구는 개인 취향에 맞추면 됩니다. 저는 스마트폰 메모 앱과 수첩 또는 노트를 같이 씁니다. 길에서는 스마트폰에 빠르게 적고, 사무실에서 차분히 정리할 때는 수첩이나 노트를 활용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메모를 손글씨로 남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내용을 디지털로 관리합니다. 방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죠. 메모는 자신에게 편리한 도구로 하는 게 맞습니다. 불편하면 금세 멈추게 되니까요.
메모는 쌓아두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일정한 주기로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그 주에 쌓인 메모들을 검토합니다. 며칠 전에 적어둔 단상과 어제 적어둔 메모가 연결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떠오르곤 합니다.
혼자서는 별 의미 없던 조각들이 나란히 놓이는 순간 서로를 비추며 한 편의 글로 자라납니다. 메모의 진짜 힘은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읽지 않는 메모는 죽은 메모이고, 다시 읽는 메모는 살아 있는 글감 창고입니다.
메모 습관이 자리 잡으면 삶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바뀝니다. 메모하는 사람은 일상을 유심히 보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냥 지나치던 풍경에 한 번 더 시선이 머물고, 흘려듣던 대화에 한 번 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삶의 해상도가 높아진다고 할까요. 글감을 찾으려 애쓰기 때문에 생기는 변화입니다. 메모 효과는 단지 글감만 늘어나는 게 아닙니다. 삶 자체가 풍요로워집니다. 평범했던 하루 안에 사실은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삶의 밀도가 달라지는 겁니다.
글 쓰면서 살고 싶다면, 메모는 필수입니다. 메모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메모를 꾸준히 한 작가가 재능 있는 작가를 이기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재능은 한정되어 있지만, 메모는 무한히 쌓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한 줄이라도 남기기 시작하면 됩니다. 그 한 줄들이 쌓이면 어느 날 한 편의 글이 되고, 그 글들이 쌓이면 한 권의 책이 되고, 그 시간들이 쌓이면 한 사람의 작가가 됩니다. 메모 습관 하나가 글쓰기 인생을 바꿉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