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에 남은 선, 숨결에 남은 언어

구상과 이중섭을 기억하며

by 별꽃서리

바람결에 남은 선, 숨결에 남은 언어

- 구상과 이중섭을 기억하며


김미진



어떤 예술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향기처럼 가슴속에 오래 남아 있다. 눈을 감으면 다시 떠오르고, 마음을 기울이면 멀리서도 그 미세한 울림이 들려오는 예술. 구상과 이중섭의 세계가 바로 그러하다.


그들의 예술은 화려한 색채나 요란한 목소리로 우리를 붙잡지 않는다. 대신 한 줄의 선, 한 줄의 문장만으로도 오래도록 마음을 적시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가을 끝자락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처럼 조용하고, 겨울 강 위에 얼음이 맺히기 전 물결이 마지막 떨림을 남기고 사라지는 장면처럼 고요하다. 하지만 그 고요 속에는 삶을 견뎌낸 자만이 품을 수 있는 절실함의 체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중섭의 그림을 바라보면 때때로 마음 한켠이 아릿해진다. 굵은 선 하나에도 그의 온 생이 담겨 있는 듯해서다. 그가 은박지를 긁어내며 새긴 선들은 언제나 조금은 흔들리고, 조금은 기울어 있다. 그러나 그 선의 떨림은 약함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명, 이겨내려는 몸짓으로 보인다.


그의 모든 작품은 결국 한 사람의 사랑과 그리움을 중심으로 채워진다. 일본으로 떠나 헤어져야 했던 가족에게로, 그리움의 끝에서 부서질 듯 다가갔던 아이들의 얼굴로, 그는 매일같이 슬픔으로 선을 그렸다.


그렇게 새겨진 그림 중 소 그림은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남편이었던, 세상의 무게에 고개를 숙이지만 끝내 일어나야 하는 고독한 존재의 의미였다.


구상의 문장은 소리보다 침묵이 길다. 그가 쓴 단어들은 마치 잠들기 직전의 마음처럼 맑고 차분하며, 어떤 비애와 은총이 동시에 스며 있다.


그의 시는 세상을 향해 흘리는 눈물보다, 눈물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길에 더 가깝다. 그는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신, 그 고통을 비추어 본 후에 남는 잔빛을 조용히 기록했다.


구상의 언어는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그 절제된 언어의 결을 따라 걷다 보면 문장 사이사이에 실핏줄처럼 흐르는 인간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된다. 그의 언어는 우리에게 되묻는 듯하다. 어디에 서 있으며, 바라본 세계는 어떤 색이었는지.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한 번쯤 들여다보게 만드는 사려 깊은 손길처럼 느껴진다.


구상과 이중섭이 남긴 예술은 모두 절제의 미학 속에서 완성된다. 그 절제는 자신의 상처를 숨기려는 억압이 아니라, 상처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찾아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예술은 때때로 큰 목소리보다 작은 속삭임에서, 강렬한 색채보다 죽은 듯 고요한 흑백 속에서 더 오래된 진실을 드러낸다. 하여, 이중섭의 선은 세상의 모진 바람에도 꺾이지 않으려는 작은 불씨였고, 구상의 문장은 인간이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가장 은은한 기도였다.


2025년 11월 26일 수요일 오후 3시. 대구 한국전선문화관의 늦가을 공기는 유난히 차분했다. 그 고요 속에서 한 시대를 버티며 서로를 지켜보던 두 예술가의 우정이 담긴 문인연극 - 구상과 이중섭 『닮은 모습으로』가 무대 위에서 되살아났다. 한국전선문화관. 대구문학관(관장 하청호 시인) 주최로, 올해 창립 15주년을 맞이한 (사)영남문학예술인협회(이사장 장사현)의 주관으로 준비된 연극은 많은 관람객의 기대 속에 막을 올렸다. 무대 조명은 눈부시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작은 공간을 비추는 묵직한 설렘이었다.


무대에 오른 이들은 전문 연극인이 아닌 영남문학 선생님들이었다. 총괄에 유진서 편집인, 극본. 연출에 이지희 시인, 구상 역에 권병엽 시인, 이중섭 역에 김창봉 시인, 김관식 시인 역에 박치명 시인, 박인환 역에 권서옥 시인, 최정희 작가. 이중섭 장모 역에 박정미 시인, 이중섭 모. 윤금숙 소설가 역에 전영귀 시인, 나혜석 화가 역에 이정하 시인, 내레이션. 남덕 역에 최수련 시인, 다방 마담역에 조아랑 시인, 김수영. 북조선 검열관. 경찰 역에 피송열 시인, 시 낭독에 한은정 수필가, 무대. 소품에 조정래 시인 등 영남문학을 위해 솔선수범 하시는 분들이었다.


막이 오르자 그들의 연기는 놀라울 만큼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연극을 해온 사람들처럼 몸짓과 대사의 호흡, 몰입도가 단순히 좋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 눈빛, 숨결 하나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듯했다. 한 시대의 고통과 가난, 전쟁의 상흔을 딛고 삶의 뒤안길에서 서로를 부축해 주던 두 예술가의 시간이 배우들의 움직임 속에서 온전히 살아났다. 갑자기 밀려오는 이 전율은 뭘까. 전문 연극인의 기술적 완성도보다 더 깊은 울림이 내 심장을 여과 없이 관통했다.


두 사람이 남긴 우정의 자취를 떠올리면, 먼저 그들의 삶을 가로지르던 고단함이 눈에 들어온다. 구상은 말의 자리에서 세계를 붙들던 시인이었고, 이중섭은 붓 끝으로 겨우 삶을 지탱하던 화가였다.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삶의 압력에 눌리면서도 내면 깊은 곳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을 지키려 했다. 서로의 존재는 그 불꽃을 조금 더 오래 밝게 유지하게 한 작은 바람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인연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자연스럽게 지금의 나로 향한다. 관계라는 것이 늘 그렇듯, 꼭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옆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이 버텨낼 수 있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런 자리를 얼마나 지켜왔는지, 혹은 누군가에게 그런 자리가 되어준 적이 있었는지 되묻게 된다.


구상과 이중섭의 우정이 내게 던지는 가장 명료한 메시지는 어쩌면 이것이다. 한 사람의 예술은 고독 속에서 태어나지만, 그 고독을 견디게 해주는 힘은 결국 관계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서로를 이해하려 애썼기에 그들의 작업은 생을 조금 덜 흔들리는 상태로 통과할 수 있었고, 그 흔적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나만의 세계를 완성하려는 마음과, 그 세계가 흔들릴 때 기댈 수 있는 타인의 존재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있다. 때로는 스스로를 너무 깊이 들여다보느라 지쳐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가까운 사람들의 다정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지나치기도 한다. 그런 나에게 두 사람의 우정은 아주 단순하지만 잊기 쉬운 사실 하나를 다시 상기시킨다.


예술가의 삶은 고단하고 외로웠지만 그들 사이에 있었던 신뢰와 우정은 타임머신을 타고 늦가을 대구의 전선문화관에서 다시 피어났다. 마치 겨울 강을 건너던 달빛이 하룻밤의 빛을 강물 위에 모두 쏟아내듯, 그들의 예술도 세월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살아나 관람객들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바람이 스쳐 지나는 자리, 고요한 물결이 남긴 잔상처럼 구상과 이중섭, 두 사람의 문학과 예술이 먼 시간을 거쳐 이 시대 혼불처럼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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