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정원정신의학과 의원 김정곤 원장님 초청
서시를 읽는 오후
김미진
2026년 3월 8일 낮 12시 30분, 울산병원 9층의 작은 공간에 사람들이 모였다.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이 무척 따사롭다. 시를 읽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울산병원 김매자 원장님의 사회로 모임이 시작되었다. 짧은 커트 머리의 우아한 모습과 차분한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윤동주의 시를 낭송하는 모임>이라고 했다. 시를 읽는 자리가 병원 안이라는 것이 왠지 낯설고 생소했다.
이윽고 모임의 한 사람인 김정곤 원장님께서 밝은 얼굴로, 불편한 다리를 보조기에 의지한 채 서서 발표를 하셨다.
윤동주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북간도의 풍경과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했던 한 청년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의 대표작 <서시>로 이어졌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첫 문장을 듣는 순간 행사장 안은 고요해졌다. 9행의 짧은 시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오래 붙들어 두는 시라고 원장님은 말씀하셨다. 나 또한 시를 통해 내 삶을 다시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유년의 암울했던 시절, 나를 지탱해 주던 시 역시 <서시>였다. 밤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은 어린 나에게는 꿈이었고, 희망이었다. 일찍 하늘나라 가신 아버지대신 어두운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었다.
김정곤 원장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북받쳐 오른다. 얼마 전 사모님의 생신날, 원장님께서 기적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병마와 긴 시간을 지나온 끝에 맞이한 그것은 분명 작은 기적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원장님의 밝은 모습은 그래서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시가 말하는 양심과 삶의 자세가, 단지 문장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을 통해 다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이어서 최경자 낭송가께서 시를 낭송하였고, 김매자 원장님의 시 낭송도 이어졌다. 시와 노래가 흐르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마음속에 작은 불씨 하나를 건네받고 있었다.
행사가 끝난 뒤 울산 동구 일산수산물판매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그 안에 있는 꼭지초장 횟집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김정곤 원장님께서 귀한 자리를 마련하신 것이다. 시 낭송을 듣고 박정미 선생님께선 그 자리에 모이신 선생님들께 감동의 시 한 편을 선사했다.
윤동주 시인 시 낭송을 듣고
박정미
계절이 지나간 하늘은
봄빛으로 가득 차 있다
부끄러움에 대해 노래하던
윤동주와 따뜻한 차 한잔
나누고 싶은 계절
쓸쓸함이 아닌
하늘과 바람과 시와 별들
새롭게 태어나
세상을 가득 채우고
아름드리 피어나는 꽃들
슬픔이 아닌
기쁨으로 노래하는
그를 만나고픈 계절인데..
어느새 나는
별을 헤던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살고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김정곤 원장님, 정석현 고문님, 장사현 이사장님, 박치명 부이사장님, 손수여 박사님, 유진서 편집인님, 박정미 선생님, 주분교 선생님, 류현순 선생님, 김경희 선생님, 전남원 선생님, 신대원 선생님, 조정래 선생님, 그리고 나까지. 감동의 큰 박수를 보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같은 문장을 듣고, 같은 시간 속에 머무르는 일, 그것은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풍경으로 남았다.
식사를 마친 뒤 영남문학 선생님들과 울산 동구 전하동 김정곤 원장님의 진료실이 있는 정원정신건강의학과 의원으로 향했다. 태화강이 내려다보이는 차창 옆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기념사진을 찍고 담소를 나누었다.
손수여 박사님께서는 가방에서 책 몇 권을 조심스럽게 꺼내셨다. 오래 곁에 두고 읽어온 듯한 책들이었다. 책등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손수여 박사님은 그 귀중한 책들을 한 권씩 설명하며, 김정곤 원장님께 특별히 아끼던 책이라며 건네주셨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에게 책을 건넨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오래 품어온 시간을 함께 건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이 지나온 사유의 길이, 또 한 사람의 삶으로 조용히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거창한 사건이 아니다. 함께 시를 읽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웃으며 인생이야기를 나누는 소소하지만 값진 시간들일 것이다.
윤동주. 그는 비록 스물일곱의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의 주옥같은 시들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멈춰 세운다. 소중한 시간 속에 문학을 매개로 서로의 마음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김정곤 원장님을 보면, 사람의 삶에도 시처럼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순간들이 불쑥불쑥 찾아온다는 것을 실감한다. 부디 영남문학 선생님들의 따뜻한 마음이, 원장님께 빛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시를 쓰고, 시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잊고 있던 나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하늘이 유난히 시리고 푸르다.
지금껏 나는 하늘을 우러러 과연 얼마만큼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았는가. 정원의 공기 속에 머물러 있던 <서시>의 한 문장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파고들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