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진 단편소설(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해안가를 따라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안갯속을 달리고 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은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듯한 체격에 모자를 눌러쓴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열린 창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노인은 능숙한 운전 솜씨로 안갯속을 뚫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 소리를 듣고 미모의 여인이 집안에서 뛰어나왔다. 노인이 차에서 내리자 여인은 폴짝 뛰어올라 그의 목에 매달렸다.
안개가 걷히고 태양이 침대 속까지 파고들 때쯤 노인은 눈을 떴다. 멀찍이 커튼을 사이에 두고 다른 침대에서 자고 있는 로라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사이로 비치는 잠든 모습이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로라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생김새는 프랑스인 아버지를 빼닮아 이국적이었지만 체구는 아담했다. 유난히 흰 얼굴에 짙은 속눈썹, 검고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이 노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노인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푸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가운데 젊은 연인이 손을 꼭 잡고 백사장을 거닐고 있었다. 얼마나 좋은 때인가. 그도 분명 저런 때가 있었다. 젊음이라는 패기와 용기가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그의 곁에 함께 있었다. 노인은 휴우,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방으로 다시 들어와 소파에 앉아 먼발치에서 로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둥이 요란하던 어느 날, 노인은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켰는데 검사결과 다행히 일시적 증상이었다.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하던 로라는 그날 이후 그의 침실에 자신의 침대를 들였다. 얼마 후, 로라가 눈을 비비고 상체를 뒤틀며 기지개를 켜더니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인은 2층 서재에 들어가면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곳은 그만의 비밀 공간으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설령 로라라 할지라도.
노인은 로라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었지만 서재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완고한 성격을 잘 아는 로라는 더 이상 서재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관심 갖지 않았다. 화가인 로라 자신도 한번 작업실에 들어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지 꼬박 6년의 시간이 흘렀다. 무작정 프랑스를 떠나 엄마의 고국인 이곳에 정착하기까지 로라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막막한 심정으로 엄마의 낡고 오래된 수첩에 적혀 있던 노인의 집주소를 찾아갔다. 그곳은 각종 전기재료와 조명등을 파는 제법 큰 대리점이었다. 키가 180센티정도 되어 보이는 호리호리한 젊은 청년이 앞장서며 로라에게 따라오라고 했는데,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안가 2층 저택에 노인이 살고 있었다. 로라가 가방에서 엄마의 낡고 빛바랜 수첩을 꺼내 보여주었을 때, 노인은 한참 동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한동안 말이 없던 노인은 엄마의 옛 친구로서 도와주겠노라며 로라가 그의 집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시간은 안갯속에 갇혀 더디게 흘렀다. 노인은 안개에 몸을 맡기고 테라스에 앉아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마음이 괴로울 때 습관처럼 듣는 곡이었다. 노인은 눈을 감았다. 기억의 저편에서 한 여인이 그에게 손짓을 했다. 그는 안개를 헤쳐 가며 여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온화한 미소의 여인이 자꾸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태양 속으로 뛰어갔다. 그는 숨이 찼다. 여인을 따라 필사적으로 뛰어도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손을 뻗어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았다. 누군가 손을 잡는 바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로라였다. 노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안개는 말끔히 걷혀 있었다. "파파,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로라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서툰 한국말로 물었다. 노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즘 들어 눈만 감으면 반복되는 현상들에 마음이 착잡했다. 노인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로라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가엾은 로라---.
*
소년은 열일곱의 앳된 모습이었다. 철모를 쓰고 헐렁한 군복을 입은 모습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전쟁이 터지자 펜을 던지고 많은 학생들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나라 없는 설움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숱한 설움을 당하며 이루어낸 광복 앞에서 또다시 자유를 잃을 순 없었다. 소년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사고하는 능력까지 어리진 않았다. 국민 모두 똘똘 뭉쳐 조국의 자유를 지켜내고자 했다. 유복자인 그도 홀로 계실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지만 큰 결심을 하고 편지 한 장만 남겨놓은 채, 몰래 집을 빠져나와 전선에 뛰어들었다. 1950년 8월, 무더위가 한창 극성을 부릴 때였다.
소년은 일주일간의 혹독한 훈련을 받은 뒤, 군번을 받고 전선에 투입됐다. 전선에선 밤낮 총성이 울려 퍼지고 총에 맞은 부상병도 수없이 속출했다. 적은 낮에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밤에는 기습적으로 쳐들어와 거의 매일 밤 죽음과의 공포 속에서 사투를 벌여야 했다. 같은 반 친구 현석은 낙동강 전투에서 적과 싸우다 날아온 총탄에 머리를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총탄이 철모를 뚫은 것이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도 소년은 눈물을 삼켜가며 전투를 계속해야 했다. 현석은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둘도 없는 소꿉친구였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특히 좋아하던 문학소년 현석은 밤이면 소년을 몰래 불러내 별을 보며 시를 읊어대곤 했었다. 소년은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어둠 속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적진을 향해 정신없이 총을 쏘아댔다.
매일 밤, 매서운 추위와 싸워가며 아군은 북으로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피로 물든 산천은 적군과 아군의 시체로 넘쳐났다. 비록 적군이지만 같은 동포끼리 싸워야 하는 기막힌 현실에 가슴이 먹먹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싸워야 했다. 조국이 있어야 자신도 있는 것이다. 추위와 싸워가며 피로한 몸을 이끌고 뒤처지지 않고 일행을 따라가야 할 때,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어머니가 해주신 따뜻한 밥이 먹고 싶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오신 분이었다. 살아계시기는 한 건지. 말없이 집을 떠나온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속으로 사죄를 해봐도 무거운 마음은 점점 더 가라앉기만 했다. 꼭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께 효도하리라 생각하며 소년은 눈시울을 붉혔다.
전쟁이 치열해질수록 강산은 점점 폐허로 변해갔다. 추운 한겨울 벌떼같이 내려오는 적군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민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갑자기 빗발치는 총탄에 가재도구도 못 챙긴 채, 떠나는 피난민들도 많았다. 제트기의 요란한 굉음과 빗발치는 포탄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허겁지겁 몸만 겨우 피신했다. 흥남 항에서는 피난민 약 10만 명이 철수하는 배를 타기 위해 달려들다가 부모 손을 놓치거나 자식 손을 놓쳐 울부짖는 소리가 부두에 메아리쳤다. 12월의 매서운 추위도 부두의 울부짖음 속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소년이 있는 부대도 얼마 되지 않아 적군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날 다행히 소년은 황급히 뛰어오며 소리치는 주민의 말을 듣고 잽싸게 그곳을 빠져나와 며칠 전, 파놓은 포진지로 몸을 숨겼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적이 쏘아대는 포의 굉음과 함께 건물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건물에서 뛰쳐나오는 병사들에게도 사격이 가해졌다. 소년도 적군을 향해 MI 소총을 쏘아댔다. 포를 쏘던 적군 두 명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잔뜩 긴장하며 총을 쏘고 있을 때, 누군가 잽싼 동작으로 포진지로 뛰어들었다. 소년의 선임하사였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소년을 발견하곤 자신이 엄호사격을 해 줄 테니 빨리 대대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 소년도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최대한 낮추어 하천 쪽 갈대밭으로 힘껏 뛰었다. 한겨울이었지만 등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선임하사의 사격 소리를 뒤로 하고 소년이 뛰자 총탄이 갈대밭으로 날아들었다. 키가 큰 갈대밭을 이리저리 헤쳐 가며 뛰고 있을 때, 총알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옆구리에서 피가 흘렀지만 소년은 뛰고 또 뛰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저만치에 다리가 보였다. 그곳에 아군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소년은 기진맥진한 채, 그곳에 도착해 위급함을 알렸다. 대대에선 곧장 여러 대의 탱크를 앞세워 지원에 나섰다. 적군과의 접전 끝에 선임하사와 몇몇 대원들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소년은 살아 돌아온 선임하사를 보자 눈물이 터졌다. 많은 병사를 한꺼번에 잃은 선임하사도 소년의 어깨를 토닥이며 굵은 눈물을 떨어트렸다.
소년은 후방에 있는 야전병원으로 보내져 며칠간 상처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총탄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서 치료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선영은 그곳에서 간호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보다 한 살 어렸고 갸름하고 앳된 얼굴에 체구는 작았다. 환자 간호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는데 심한 부상자에게도 찡그리거나 싫은 내색 없이 평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대했다. 부상자들이 심한 고통으로 마구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해도 그녀는 움츠러들거나 도망가지 않고 치료에만 최선을 다했다. 그 모습에 소년은 크게 감동했고 자신이 도와줄 게 없는지 선영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선영은 귀찮을 법도 한데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부상자의 치료에 집중했다. 그녀를 따라다니며 작은 것이라도 도울 수 있어서 소년은 기분이 좋았다. 잠은 늘 부족했고 먹는 것도 허술했지만 부상자를 돌보는 선영의 희생정신과 정신력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부상자는 계속 늘어나고 그녀의 손길도 점점 바빠졌다.
며칠 후, 그곳을 떠나 부대로 돌아가는 날, 소년은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다시 전선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급기야 병실 여기저기를 뒤져가며 선영을 찾아내 자신의 집주소가 적힌 쪽지를 던지듯 손에 쥐어주고 뛰쳐나와 군용차에 올라탔다. 병원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소년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몹시 쿵쾅거렸다.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지루하게 전쟁이 3년 1개월 만에 종식되고 휴전체제로 돌아서자 소년은 만기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4년여 만에 찾은 고향집은 폭격을 맞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고 어머니의 행방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고향은 전쟁을 피해 피난 내려온 낯선 사람들과 전쟁고아로 가득 차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그곳이 정말 자신의 고향이 맞는지 낯설기만 했다. 어쩌다 고향 사람과 마주쳤지만 그들도 어머니의 행방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머니를 꼭 찾아야만 했다. 소년은 날마다 시장 통이며 병원을 뒤져가며 어머니를 찾아 헤맸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도 점점 옅어져 갔지만 어머니를 찾는 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폭격으로 날아간 집터에 널빤지를 주워와 대충 집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소년이 어느 날, 시장에서 짐 옮겨주는 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 앞 길가에 선영이 서 있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비비고 또 비벼봐도 선영이 틀림없었다. 선영은 소년을 보자마자 달려와 안겨 왈칵 울음을 터트렸는데 그런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선영은 목이 메어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엔 잡초만 무성할 뿐, 그토록 보고 싶던 부모님과 여동생은 찾을 길이 없었고---몇 날 며칠을 수소문해 보아도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어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그곳이 소름 끼치게 무섭고 두려워 달려왔다며--- 소년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소년도 그녀의 꺼져가는 울음소리를 들으니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끝내 터져버렸다.
그날 소년은 창백한 모습으로 잠든 선영 옆에 나란히 누워 동이 트도록 잠들지 못했는데, 마음속에만 그리던 그녀와 한방에 있다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과 제멋대로 뛰는 가슴의 두근거림 때문이었다.
선영의 등장은 그에게 떠오르는 태양의 찬란한 빛과 다름없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해주진 못해도 행복한 나날이었다. 눈을 뜨면 선영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힘든 막노동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면 선영이 끊인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잃었던 식욕을 자극했다. 그는 그 시절 밤마다 꿈을 꾸었는데 총에 맞아 전사한 어린 전우들의 살려달라는 비명소리에 놀라 잠이 깨곤 했다. 그중 전사한 소꿉친구 현석의 얼굴도 보였다. 현석은 깔끔한 군복 차림으로 나타나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반가워서 현석아! 부르며 다가가려 하자, 현석은 빛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밤마다 눈을 감으면 자욱한 안갯속에 전선이 보이고 혹독한 추위 속에 동상에 걸려 힘들어하는 전우, 며칠씩 밥을 굶어 누렇게 뜬 얼굴로 솔잎을 뜯어먹으며 겨우 버티고 있는 전우, 적을 피해 참호 안에서 추위에 떨며 건빵 한 봉지로 며칠째 버티고 있는 전우 등 그들의 숨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렸고, 어떤 날 밤엔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잠에 못 이겨 눈을 감고 행군하는 자신의 모습도 선명하게 보였다.
어느 날부턴가 그는 일을 마친 후 집으로 가기 전에 허름한 술집에 들어가 겁에 잔뜩 질린 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며 몽롱한 기분으로 집에 도착하면 선영이 그를 부축해 방에 뉘었다. 수면장애로 많이 수축해졌어도 선영보다 월등히 큰 체격의 사내를 부축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는 누워서도 바로 잠들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선영아! 선영아! 하고 크게 불러댔다. 선영이 말없이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주면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손꼽아 기다려온 선영의 임신소식에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얼굴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무리 찾아 헤매도 행방을 알 수 없으니 근심과 걱정 속에 지내던 터였다. 그 마음은 자신뿐 아니라 선영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말할 수 없이 기뻤지만 마음 한 구석은 늘 텅 비어있었다. 서로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응어리진 속마음을 겹겹이 쌓아 내면 깊숙이 묻어두었다. 선영은 입덧도 거의 하지 않고 잘 지내다가 열 달 후 새벽에 진통이 오자 이웃의 노련한 산파를 불러왔다. 진통은 이틀 동안 계속되었고 선영은 탈진상태에서 사내아기를 낳았다. 산파가 아기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울음소리도 신통치 않고 몸집도 다른 아기들보다 유독 작았다. 아기를 배냇저고리에 싸서 선영에게 조심스럽게 안겨주자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도 선영과 아기를 끌어안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두 사람은 기뻤었다. 그 기쁨도 잠시, 아기는 울지도 않고 젖을 빨려고도 하지 않았다. 허겁지겁 동네 의원을 찾아갔지만 아무 병명도 찾아내지 못하고 아기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은 눈이 뒤집혔다. 의사의 멱살을 잡고 병원이 떠나가도록 아기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가 의사에게서 선영을 억지로 떼어내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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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승용차에 올라타 천천히 운전을 해나갔다. 속력을 내고 싶었지만 행여 안갯속에서 로라가 걱정할까 봐 느리게 차를 몰았다. 며칠 전 "가고 싶은 데 있어, 로라?"라고 묻자 "경주에 한 번 가보고 싶어요, 파파." 하고 로라가 대답했다. 그곳에 예전 선영과 함께 신혼여행 삼아 다녀온 곳이기도 했다. 역사도시이기도 한 그곳에 로라의 궁금증은 대단해서 꼭 한 번은 데려가 줘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그렇게 하자고 했을 때 로라는 너무 좋아서 그에게 달려와 키스는 퍼부었다. 노인은 아기 같은 그녀의 행동에 말없이 등을 토닥여주었다. 앞으로 이런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최대한 그녀에게 많은 여행을 시켜주고 한국의 문화를 제대로 알려주고 싶은 게 노인의 속마음이었다. 비록 생김새는 푸른 눈의 아가씨지만 그녀의 몸엔 엄연히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이곳 사람들과 어울려 혼자서도 당당히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일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선영을 만나 사랑을 하고 그녀와 헤어질 때 어쩌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을 벗어나 이역만리타국으로 그림을 배우러 간다 할 적에도 그는 선뜻 말리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의 오랜 꿈이었고 남아있는 한줄기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기가 병명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나버리자 선영은 음식도 거부한 채 시름시름 앓아누웠다. 그는 몇 달간 정성껏 간호했고 선영은 겨우 몸을 가누기 시작했다. 풀려버린 동공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그녀는 입만 열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넋이 나간 그녀에게 가지 말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좁고 어두운 술집에 틀어박혀 술로 위안을 삼았다. 그녀가 프랑스로 떠나는 날 그는 공항에 나가지 않았다. 몇 년 후 그녀에게서 들려온 소식은 그곳에서 프랑스 남자와 결혼했다는 짧은 엽서 한통뿐이었다.
로라는 모든 것을 신기해했다. 맨 먼저 찾아간 곳은 석굴암이었는데 잘 조각된 본존불상 앞에서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엄마의 꿈결 같은 이야기 속에 나오던 현장에 직접 서있다는 것과 선조들의 뛰어난 조각 기술에 절로 감탄사를 연발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불국사 경내에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에서도 오랜 시간 스케치를 하며 눈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다. 시내 한복판 고목이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왕릉 앞에서도 연신 감탄하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인은 그런 로라를 보니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해 남산 꼭대기에 올라 주변 경치를 스케치하는 로라 옆에 앉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사뭇 진지 했는데 쳐다보고 있을수록 선영의 갸름한 얼굴이 겹쳐져 떠올랐다. 왜소한 몸매에 갸름한 얼굴을 가진 그녀가 프랑스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이 일제히 정지되는 느낌이었다. 왜 자신이 아닌 프랑스 남자인지 달려가 따져 묻고 싶었다. 한동안 끓어오르는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러다가 차츰 모든 것을 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그녀를 마음속에서 힘겹게 몰아낸 후 그는 많은 여자를 만나고 헤어졌다. 그중에 마음이 가는 여자도 한 명 있었지만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와의 사랑 앞엔 어떤 높다란 장벽이 가로막혀 있었다. 그가 아무리 그 장벽을 깨부수려고 해도, 장벽은 점점 높이 솟아오를 뿐이었다. 그녀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기다려주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고통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선영을 떠나보내고 난 후 실의에 빠져 술로 지새웠던 수많은 밤들이, 그 절망적인 어둠들이 유령처럼 시시때때로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그가 아무리 부정해도 바뀌지 않는 것, 그에게 남은 것은 선영에 대한 그리움과 영혼이 텅 비어버린 육체의 빈껍데기뿐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일과 운동에 파묻혀 지냈다. 로라가 스케치를 다 마쳤는지 산을 내려가자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날씨가 좋아 로라와 첨성대 주위를 천천히 거닐고 있을 때였다. 왕과 왕비 행렬 행차가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갔다. 왕과 왕비는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금빛으로 수 놓인 햇빛 가리개 밑에서 여유롭게 웃으며 관광객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뒤로 신하와 병사들이 우르르 뒤따르고 있었다. 그 옛날 신라인들의 차림새였다. 로라는 폴짝폴짝 뛰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은 푸른 눈의 로라가 더욱 신기한지 눈을 떼지 못한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건장한 체격의 노인은 로라가 다칠세라 손을 꼭 잡아주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그들은 노인도 외국인으로 볼 것이 틀림없었다. 실제로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면 어깨까지 내려오는 은빛 장발의 그를 외국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편이 로라에게도 훨씬 낫지 싶어 노인은 될 수 있는 한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배고픈데 뭐 먹으러 갈까?" 노인이 로라에게 묻자 그녀는 대답 대신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이름난 쌈밥 집으로 향했다. 한옥으로 된 식당에 들어가 자릴 잡고 앉자 여러 종류의 쌈과 불고기, 각종 반찬과 된장찌개가 한 상 가득 차려져 나왔다. 로라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쌈에 불고기를 얹어 한 입 베어 물곤 예전 엄마의 손맛이라며 푸른 눈을 깜빡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모습이 왠지 짠해서 노인은 잠시 로라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박물관에 들러 대형 에밀레종을 둘러보며 로라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노인이 에밀레종에 얽힌 전설을 말해주자 그녀는 몹시 안타까워하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박물관 내부 전시실을 둘러보며 화려한 금세공 기술에 놀라워하기도 하고 불상 조각에 매료되어 여러 장의 스케치를 남기기도 했다.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로라는 차근차근 여러 곳의 전시실을 둘러보며 꼼꼼히 메모했다. 화장실에 잠깐 다녀오는 사이 로라는 다른 전시실로 가버렸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로라가 구경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입구에 서서,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그의 곁을 느리게 지나쳐 갔다. 노인은 그들이 전시실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사라진 쪽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로라가 노인을 향해 걸어오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한 손에 스케치북을 들고 걸어오는 표정이 꽤나 만족한 얼굴이었다.
역사도시 구경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로라는 꽤 흥분해 있었다. 그녀는 감명 깊게 본 것들을 쉴 틈 없이 늘어놓았는데 노인은 자꾸만 피로가 밀려들었다. 그 피로는 로라에 의한 것이 아닌 내부 어디에선가 꿈틀거리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부부가 나란히 아이의 손을 잡고 그의 눈앞을 지나쳐 간 후부터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짓눌러 왔다. 그 영향인지 오는 내내 호흡이 일정치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다. 노인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시 혼자 있겠다며 로라에게 말한 뒤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서재로 들어섰다. 책들로 빽빽한 책장을 지나 창가 쪽 책상 맨 아래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빛바랜 배냇저고리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노인은 배냇저고리를 꺼내 끌어안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흐느낌은 점차 커져갔다. 서재 내부는 방음장치가 잘 되어있어 크게 운다 해도 밖으로 소리가 나지 않는 그만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로라를 집에 들인 이후 노인이 미쳤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조금씩 퍼져나갔다. 소문의 내용은 평소 미용실 근처도 가지 않던 노인이 태연히 그곳에 들러 염색을 하고, 젊은이들이 가는 옷가게에 들러 옷을 사가며, 어떤 외국인 푸른 눈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전재산을 빼앗겼다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급기야 소문은 암암리에 부풀려져 로라가 그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말조차 뒷골목에서 떠돌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의 진상을 캐내기 위해 평소 형님, 형님 하며 그를 따르던 옆 가게 정 사장이 나서 보기로 했다. 나지막한 키에 뚱뚱한 체격의 그는 동네에서 제법 잘 나가는 중화요리 반점 주인이자 주방장이었다. 그는 얼마 전 동네 이웃들이 찾아와 짜장면을 시켜 먹으면서 나누는 대화를 얼핏 듣고 깜짝 놀라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가 몇십 년을 지켜봐 온 그 형님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지역의 여러 양로원이나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해 해마다 거액을 기부하면서도 절대로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생색 한번 내지 않는 훌륭한 형님이다. 예전에 많은 여자를 사귀었단 소문은 그렇다 해도 그건 한창 젊을 때이고, 노인은 언제부턴가 바깥 활동을 접고 집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텃밭 가꾸는 걸 낙으로 삼고 살았다. 가끔 여러 종류의 채소를 직접 재배했다며 갖다 주기도 해서 늘 고마운 마음이 드는 동네 친한 형님이었다.
노인의 집을 찾아간 정 사장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두리번거리더니 "형님은 언제 봐도 젊고 건강해 보이시네요"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노인과 소파에 마주 앉자 정 사장은 굳은 표정으로 주위에 떠도는 소문을 알고 있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노인은 그의 얘기를 듣다가 도저히 못 참겠는지 손바닥으로 탁자를 탁! 치며 버럭 화를 냈다. "도대체 세상 사람들이 언제부터 나에게 그렇게 관심을 가졌단 말인가, 당장 나가게!" 노인은 기가 차고 화가 났다. 정 사장은 그저 항간에 떠도는 소문일 뿐이라며 노인을 달래 진정시켰다. 그때 로라가 작업실에서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검은색 앞치마를 두르고 나오다가 정 사장을 발견하곤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정 사장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 로라를 흘끗 한번 보고 위아래로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그녀는 체구는 아담했지만 푸른 눈에 이국적인 외모가 돋보였다. 정 사장은 갑자기 호흡이 답답해져 헛기침을 하더니 식당이 바빠질 시간이라며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부랴부랴 저택을 빠져나온 정 사장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이 정 사장에게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여태껏 처음이어서 망치로 얻어맞은 듯 얼빠진 표정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정 사장이 가자마자 노인은 서재에 들어가 한숨을 내쉬며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노인은 아침 일찍 외출을 서둘렀다. 로라는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전날 밤늦게까지 그림 그리기에 매달려 있었다. 외출한다는 짧은 메모를 남기고 노인은 집을 나섰다. 짙은 안갯속을 헤치고 차를 달렸다. 며칠 전 정 사장이 찾아와 전해준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노인은 생각할수록 쓴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노인이 생각해도 많은 것들이 변한 게 사실이었다. 로라가 나타나면서 까맣게 잊고 지냈던 어두운 기억의 잔재들이, 분노와 애정 덩어리가 한꺼번에 성난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애써 잊고 살았던 지난 세월들과 다시 정면으로 부딪쳐야 했다. 밤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전우들의 절규 앞에서 끝없이 도망치고 싶었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인 세월의 연속이었다. 가위에 눌려 꿈속에서 비명을 지르다 보면 어느새 로라가 달려와 손을 잡아주었다. 그럴 때 그곳엔 선영이 함께 있었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선영이 그곳에 서 있었다. 로라의 아버지 가브리엘은 정신과 의사였다고 한다. 어느 날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찾아온 선영을 보고 그는 한눈에 운명임을 직감했다. 상처로 얼룩진 그녀의 텅 빈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 가브리엘은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 따뜻한 마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선영에게도 온전히 전해졌을 것이다. 선영은 가브리엘과 결혼 후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오십이 넘은 나이에 로라를 낳고 생의 둘도 없는 기쁨을 얻었다. 선영이 그토록 원했던 삶은 오롯이 가브리엘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전쟁 후 자신의 고통 속에만 파묻혀 미처 선영의 아픔을 보듬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미 늦어버린 후회가 한이 되어 노인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운전에 속도를 냈다. 타인의 지나친 관심과 얽히고설킨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자 노인은 간밤 늦은 시간까지 자신의 변호사와 길고 긴 통화를 나누었다. 차들로 뒤엉킨 번잡한 시내를 지나 법원 옆 변호사 사무실이 밀집한 곳에 도착했다. 노인은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한 건물의 이층으로 올라갔다.
오후 늦게 변호사 사무실을 나온 노인은 차를 달려 낙동강 승전기념관으로 향했다. 학도의용군 6.25 참전 기념비 앞에 흰 국화 꽃다발을 올려놓고 영령 앞에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
"나의 벗 현석아! 오늘따라 네가 무척 그립구나. 너랑 집 앞 강가에서 물놀이며 수박 서리하다 걸려 혼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세월은 반세기가 훌쩍 지났구나. 친구야, 슬퍼말아라, 나 또한 네게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비록 내 조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우린 기꺼이 몸 바쳐 지켜냈다. 현석아 ---"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 기념관을 나온 노인은 얼마 안 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아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로라가 기다리는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고속버스를 한참 달리던 노인은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도로 옆 갓길에 차를 세우고 쉬었다 가기로 했다. 자꾸만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졸음이 몰려왔다. 눈을 감자 어머니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애처롭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노인은 목이 메었다. 여태껏 찾아 헤매던 그리운 어머니를 이렇게 뵐 줄이야 --- 노인은 집을 떠나기 전 열일곱의 앳된 소년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울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그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주위로 환한 빛 무리가 소년을 에워쌌다.
노인이 안갯속을 지나자 넓은 방이 나타났다.
로라가 검은 상복을 입고 슬피 울고 있었다. 대리점을 맡고 있는 김 군의 초췌한 모습도 보였다. 흰 국화로 둘러싸인 제단 중앙엔 로라가 최근에 완성한 자신의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잘 살아야 한다, 로라'
모든 것은 자신의 변호사가 잘 처리해 줄 것이다. 노인은 힘겹게 발걸음을 돌려 현석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