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대화들이 있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발화는 휘발되기 마련이고, 이에 대한 아쉬움이 얼마 전부터 극도로 불어나서 담화집이라는 명칭으로 최대한 많이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꾸준하지 못한 탓에 깊은 동면에 빠진 카테고리들이 지금도 몇 있지만, 끝까지 못할 것 같다고 시작도 안 하는 건 나답지 않으니 거두절미하고 바로 고
B, 을지로입구, 9월 1일
*약간의 기억 왜곡과 각색이 있을 수 있음
#1
작년 말에 돌이켜보니 내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대체 어느 부분이 달라진 건지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아마도 사람을 대하는 능력을 많이 기른 것 같더라고. 군대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잖아. 근데 그 사람들이 서로 성격도 다른데 관계성까지 다 달라. 어떤 사람은 이런 성격인데 내 선임이고, 어떤 사람은 내 후임이야. 성격 다른 거 맞춰나가는 것도 어려운데 관계성까지 고려해야 하니까 그런 능력이 올라갈 수밖에 없겠더라
- 헐 나도 요즘 그런 거 느끼는 거 있다? 업무 단톡방 같은 곳에서 특히 나보다 선배인 사람의 실수를 지적해야 할 때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이 민망하지 않도록 피드백할 수 있을지 말하기 방식을 많이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 주로 사용하는 방식은 모든 말에 느낌표를 네다섯 개씩 붙이는 건데, 그렇게 발랄하게 말하면 부정적인 피드백이 오갈 때도 훈훈한 분위기가 돼서 좋더라고
#2
최근에 느낀 건데 사람들은 말을 잘 안 듣는 사람보다 착하고 말 잘 들어주는 사람한테 오히려 더 막 대하기도 하고 부탁도 더 많이 하는 것 같아. 이걸 깨닫고 나서는 달갑지 않은 잡무를 받았을 때 일부러 투덜대기도 하고.. 근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나도 마찬가지더라고. 성질 안 좋은 사람한테는 더 조심스럽게 대하게 되고 일 같은 거는 순한 친구한테 더 많이 시키고.
- 나도 그런 일 있었어. 어떤 수업에서 두 분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사전에 말씀드렸던 예상 소요 시간보다 실제로 2배나 더 걸린 거야. 근데 한 분은 엄청 적극적으로 친절하게 응해주셨고, 한 분은 조금 당황하시면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셨단 말이지. 인터뷰 끝나고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첫 번째 분께는 감사 인사만 전하고 두 번째 분께는 기프티콘까지 보내면서 감사와 사과의 말씀을 전하게 되더라. 나도 이런 거 깨닫고 나서부터 부탁이나 어려운 제안에 늘 고분고분하게 응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생색도 좀 낼 줄 알아야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균형을 잡는 게 가장 중요하지
#3
뭐든지 꾸준히 하는 게 진짜 어렵고 중요한 것 같아. 근데 요즘 좀 꾸준히 하는 거 있다? 12월부터 일기 쓰기 시작했는데 엄청 좋더라고. 쓸 때 가끔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이 감정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지? 싶은 순간들도 있는데 그래도 일단 정제하지 않고 막힘없이 쓰는 거에 집중하고 있어. 그리고 너 블로그에서 그 말이 엄청 인상적이었거든 ‘꾸준히 쓰기 위해서는 꾸준히 써야 된다는 강박을 버려야 한다’였나? 그래서 나도 일기 쓸 때 무조건 매일 써야 된다는 생각은 안 가지고 편하게 쓰고 있는데 그 마음가짐이 되게 좋은 것 같아. 아무튼 일기 쓰는 습관을 인생 전반에 걸쳐서 계속 이어가고 싶어서, 이번에 휴가 나와서도 안 멈추고 쓰려고 하고 있어. 휴가 나왔다고 안 쓰면 전역하고 나서는 무조건 안 쓰는 거잖아
- 야 너 진짜 멋있다…
#4
요즘 진로 고민 중인데 벤처경영 복전을 하고 싶더라고. 나… 창업할 거야… 나 부자 되면 어떡하지?????
- ?
아니 상상을 해야 진짜 그렇게 되지. 물론 상상한다고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상상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도 없자나
- 오 나 그런 말장난 좋아해. 뼈 있는 말장난이나 언어유희 그런 거.
어 너 그러면 이거 알아? ‘제게 잠재력을 주지 마시고 잠과 재력을 따로 주세요’
- 오 맞아 그런 거 좋아
그럼 너 송강이랑 송강호 알아? 송강 호되게 혼내기 vs 송강호 되게 혼내기… 송강 호락호락한 모습 보기 vs 송강호 락하는 거 보기…
- 헐 몰랐어 진짜 웃기네 ㅋㅋㅋㅋㅋㅋㅋㅋ
#5
너가 나한테 아까 ‘두 번 연속 얻어먹을 수는 없지’라고 했잖아. 나 그거 듣고 우리 되게 염치 있는 관계다, 이거 되게 좋다 라고 생각했다? 염치 있는 관계가 지속력이 좋은 것 같더라고.
- 맞아 나도 진짜 그래. 그니까 난 내가 더 내는 게 싫거든? 근데 덜 내는 건 더 싫어. 둘 다 별로인 거지. 근데 만날 때마다 칼 같은 더치페이는 좀 정 없는 것 같아서 이렇게 한 번은 사고 한 번은 얻어먹고 하는 게 부담도 없고 마음도 편하고 좋아.
#6
군대 동기 중에 진짜로 고마운 친구가 있거든? 작년 연말정산하면서 가장 고마웠던 사람 떠올려봤을 때 걔밖에 생각이 안 날 정도로? 걔는 진짜 사람이 너무 착해. 엄청 선해. 성격이 진짜 좋아. 군대 물론 선임 후임 다 중요하긴 하지만 동기가 가장 중요하잖아. 어떻게 우연이 이렇게 맞아떨어져서 얘랑 3월에 동기로 같이 입대하게 된 게 너무 고마운 일인 것 같아. 진짜 딱 한 가지 안 좋은 점은 얘가 집이 여수래. 위쪽에 살면 사회 나가서도 자주 볼 텐데.
- 우와… 운이 진짜 중요한 것 같다는 걸 새삼 느끼곤 한다? 어떤 순간에 누구를 만나느냐… 뭐 그런 거. 진짜 좋겠다. 근데 있잖아 나 그때 여의도 갔을 때 어떤 분이 새우튀김 요리를 해오셔서 그걸 진짜 맛있게 먹으면서 한 3번 연속 “아 진짜 맛있어요”만 남발했거든? 그랬더니 내가 찾아갔다던 경제 유튜브 그분께서 나한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런 거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되게 뼈 있는 말이어서 인상 깊었는데…그러니까 내 말은 그 동기가 어떤 식으로 성격이 좋은 건데? 어떤 식으로 착한 거야? 너도 지금 좀 구체적으로 말해봐
음 그러니까… 분명 평소에 얘 하는 걸 보면 승부욕도 있고 자존심도 있는 애거든? 근데 자존심을 부려야 할 것 같은 상황이나 당연한 욕심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항상 먼저 내려놓고 양보해. 본연의 자존심을 의지와 노력으로 덮어버리는 게 나는 너무 신기하더라고. 그리고 걔는 남한테 피해 주는 걸 되게 싫어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어떤 업무 두 개가 있는 상황에서 하나는 빡세고 하나는 덜 빡세면 보통 당연히 후자를 고르잖아? 저렇게 누군가는 피해 보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엔 보통 내가 편한 거를 고르는데 OO이는 그걸 너무 미안해하면서 힘든 걸 자기가 골라.
-와 진짜 대박이네… 귀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어어 맞아 귀인이라는 말이 진짜 맞아
#7
재작년부터 휴학하고나서 이런저런 활동들을 많이 했는데 뭔가 늘 땡기는 게 없는 거야. 그래서 뭐가 문제지 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직군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고 있었더라고. 어떻게 보면 직군 자체보다는 그 산업이 얼마나 내 관심 산업이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는데. 저번에 만났던 멘토님도 관심 산업을 정하고 꾸준히 탐구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했고. 그래서 내가 무슨 산업에 관심이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서… 출판… 이거밖에 없는 거야. 좀 더 넓게 쳐주면 문화콘텐츠 정도?
근데 이걸 너무 부정하고 싶었던 게, 책은… 사양산업이잖아. 그러니까, 절대 소멸하지는 않지만 결코 유망한 산업도 아닌. 돈을 벌기엔 힘든. 하지만 그래도 일단 그쪽으로 뭘 해보긴 해봐야겠더라고. 그래서 무작정 그쪽 서점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연락을 드린 거고.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경험은 이른 시기에 다양하게 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 맞아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넌 그쪽 일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최근에 인스타 내리다가 그 영상을 봤어 노홍철이 진로 조언해 주는 영상. 내용은 물론이고 노홍철의 그 진정성이 담긴 표정에서 너무 감명을 받았거든. 거기서 그러더라고. “내가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남들한테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이미 알고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 거라면 무조건 그 길을 가봐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너로는 무조건 책이란 말이지. 너 블로그 보면서도 아니 어떻게 책에 대해서 이렇게 감상을 쓸 수가 있지 싶을 때가 많았단 말이야. 그래서 아무튼… 좋은 것 같다고.
#8
음 그니까 하나도 안 친한 사람이랑 진짜 친한 사람한테는 E 같거든? 근데 애매하게 친한 사람들한테는 I 같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리가 새하얘지고 …
- 오 근데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런 거 느낄 때 종종 있다? 최근에 오목 두다가 느낀 건데, 같은 판국에서 완전 생초보자들이랑 완전 고수는 놓는 수가 좀 비슷해. 근데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뭔가 다르다? 초수랑 고수는 여기에다 놓는데, 중수는 여기 말고 다른 곳에 놔. 그거 보면서 중간 지점은 양 끝과는 차이 나는 다른 특성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우왕 이거 되게 흥미로운 이야기다…!
#9
엥 너가 infj라고???? 내가 infj가 나오는데?????
- 아니 나도 지금까지 isfj가 나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n인 것 같은 거야. 그니까 막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 1층 위로는 2층인데 왜 아래로는 지하 1층일까? 왜 0층은 없는 거지? 라든가, 왜 손톱은 내 마음대로 안될까 내 몸인데 왜 내 의지에 따라 자라지 않는 거지? 이런 거. (여기서 나는 현웃 터짐 진짜…) 아니 그렇지 않아? 다이어트나 운동 같은 것도 막 정신이랑 몸이랑 따로 놀잖아. 정신의 자아와 몸의 자아가 분리되어 있는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신기하고 내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이상하고…
하진짜 너무 웃겨 아니 손톱은 뭐야??? 아진짜 웃겨. 너 성격 다시 생각해 보니까 진짜 인프제랑 비슷한 것 같긴 해. 근데 나 지금까지 infj랑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안 맞는 게 아니라 내가 무서워한다고 해야 하나? 인프제랑 있으면 긴장돼. 왜냐면 내가 알고 있는 나의 허물이 다른 infj한테도 비슷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무서워서. 그니까, 난 사람한테 되게 관심이 많거든?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지 계속 나 혼자 분석을 해. 근데 그러다 보니까 속단도 많이 하게 된단 말이야. 그렇게 마음속으로 혼자 남을 판단하고 평가 내리는 거.. 나뿐만 아니라 인프제 특성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다른 infj들도 내가 하는 것처럼 나를 속으로 분석하고 판단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긴장돼서 같이 잘 못 있겠어. 근데 인프제 성격을 진짜 좋아하긴 해. 그만큼 세심한 성격도 없잖아
#10
내가 원래 … 아니지 나 원래라는 말 되게 안 좋아하거든? 생각해 보면 세상에 ‘원래’ 그런 거는 없잖아.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엄마와 집안일의 관계에서 그걸 확 체감한 것 같아. 이 세상에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들은 없는데, ‘원래’라는 단어를 붙이게 되면 진짜 그게 정답인 것처럼 느껴지고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내 생각이 점점 갇히게 될까 봐 원래라는 말 잘 안 쓰려고 해. 근데 방금처럼 가끔씩 나올 때도 있긴 해…
#11
너랑 얘기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뭐지 왜 이렇게 재밌는 거지 싶었는데 방금 그 이유를 알았어. 너는 호오가 분명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가 명확하게 알고 있어. 왜 그걸 좋아하고 왜 그걸 싫어하는지. 호불호뿐만 아니라 어떤 생각이나 입장도 되게 명확하고, 그 근거를 바로바로 말하는 걸 보면 평소에 얼마나 성찰을 많이 하는지 느껴진달까. 고도의 자기 이해가 수반된 대화…? 아무튼 진짜 재밌어!!!!!!!!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만나는 드문 친구 중 한 명인데 그때마다 너무 편안하고 즐거워서 내 텐션이 최고조를 찍는다. 말을 좀 많이 했나 싶어서 헤어지기 전엔 항상 미안하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편하다는 거는 그 사람이 나를 많이 배려해 주고 있다는 뜻이라는데 그래서 진짜 진심으로 고맙고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