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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Jul 31. 2024

안전한 복수

서로에게 쌓인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낸다. 

  여름의 끝무렵은 물총놀이로, 겨울은 눈싸움으로 학기를 마무리할 때가 많다. 물론 날씨가 도와주어야 하는 행사이기도 하고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기도 한다. 행사 전 아이들에게 씨알도 안 먹히는 당부를 한다. 제발 선생님만 공격하지 말아 달라는, 다른 반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을 보호하더라는 비교의 말까지 하면서 부탁을 한다. 심지어 물총놀이를 시작해서도 휴대폰이 젖는다, 수건이 없다 등의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엄살을 떤다. 참여를 안 하고 지켜볼 것이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면서 늘 아이들과 폭 빠져서 논다. 당연히 나만 공격하리라는 것을 안다. 처음에 쭈빗거리던 녀석들도 용기 있는 혹은 눈치 없는 몇몇 아이의 시작으로 함께 나를 공격하리라는 것도 정해진 시나리오다. 올해도 그랬다. 물총놀이 한 시간 후에 온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다 못해 물귀신처럼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이 탓인가.. 물 먹은 옷처럼 축 쳐졌다. 너무나도 지쳤다. 그런 날 지켜보던 몇몇 교사들은 아이들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한다. 장난을 좋아하니 이런 것도 좋아하나 보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지칠 것을 감안하고 하는 이유를. 


  평소 교실에서 (집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아이들에게 예의와 상대에 대한 존중, 성실 등의 면에서는 한없이 엄하다. 물론 틈틈이 장난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교실 속에서 난 지킬 앤 하이드를 넘어서는 다중인격체가 된다. 끝없이 받아줄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말장난이나 말대꾸에 수용적이어서 아이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약간 무서워하면서도 별의별 이야기를 다 꺼내놓는다. 그러다가도 눈치 없이 장난을 멈추지 못하거나 예의 없는 선을 넘나들 때 얼굴을 굳힌다. 아이들 표현으로는 '급정색'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정도를 아는 녀석들은 나를 어려워하지 않지만 그 정도를 가늠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역시 나를 좀 어려워한다. 어느 정도 장난을 해도 되는지, 말을 해도 되는지 알지 못하기에 그렇다.  다 둘째치고 한 학기 동안 한 공간에서 지내다 보면 분할 때도 있고 억울할 때도 있을 것이다. 표현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것을 풀어헤쳐주고 싶었다, 그들이 해소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물총놀이'이나 '눈싸움'은 나를 향한 아이들의 복수의 기회를 열어주는 시간이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얹어 서로를 향해 물총을 쏘고 눈을 날리면서 복수한다. 소소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그 시간만큼은 교사와 학생도 아니고 어른과 아이도 아니다.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마음껏 풀어헤친다. 물과 함께 혹은 눈과 함께 서로에 대한 미움을 날린다. 쌓여있던 먼지를 털 듯 그렇게 털어버린다. 나의 홀딱 젖음을 그들의 희열로 삼으면서 우린 그렇게 마음을 추스른다. 그들이 시원했길!


  부모로서도 교사로서도 아이에게 건전하고 안전한 복수의 기회를 주는 것은 필요하다. 몸장난으로 혹은 놀이를 핑계삼은 어떤 것에서 아이의 감정을 털어낼 수 있게 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하다. 과하지 않게 그러나 말로 표현할 수 없던 부정적인 감정을 툭 날리는 몸으로 하는 놀이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안전하면서도 짜릿한 복수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한 해 한 해 늙어가서 언제까지 같이 뒹굴고 뛰어다니면서 서로를 맞추고자 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이 놀이는 서로에게 숨구멍이자 쌓이는 감정 없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좋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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