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2번 타자

메이저리그 2번 타자

by 엘레나 리아

늦은 밤 프로덕션 대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걸려온 시간으로 봐선 약주를 한 잔 걸쳤을 게 분명했다.

다음 날 "잠들어서 못 받았어요 죄송해요."라고 할까? 싶었지만

어차피 하실 말씀은 예상이 됐기에 빨리 통화하고 끊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받았다.


역시나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였다.

더 신경 써 달라, 더 열심히 해보자였다. 그리고 생전 안 하던 말씀을 툭 하셨다.

"자기가 했던 프로그램들을 보면 뭐 괜찮지

자긴 메이저리그 2번 타자 같달까?"


메이저리그 2번 타자

나는 야구 룰을 하나도 모른다.

타자가 공을 때리는 사람 투수가 공을 던지는 사람.

물론 박찬호 선수, 오타니 선수 급의 전설적인 선수들은 안다.

그리고 4번 타자가 제일 실력 있다는 것도 대략은 알고 있다.


메이저리그 2번 타자

메이저리그는 분명 좋은 건데 2번 타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칭찬인지 내려 까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며칠 동안 계속 궁금했다.

포털사이트에 검색했더니 답변들이 제각각이다.

야구를 잘 모르기에 친절하게 설명된 글을 봐도 정확히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다만 현대 야구에서 2번 타자의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대표님은 지극히 옛날 분...

이 분이 요즘 현대 야구 트렌드를 알 리가 없다.


결국 '나는 홈런을 터트리는 4번 타자가 아니구나'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 나서 내가 참여했던 프로그램들을 떠올려보니 실제 어느 정도 수긍은 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다 아는 대한민국 지상파 채널에서 주로 일했지만

맡았던 프로그램들은 아는 사람들도 있고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거 같은 프로그램들이다.

특집을 맡은 적도 많았기에 <아마존의 눈물> 같은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아무리 특집 프로그램 제목을 말해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글짓기, 독후감 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던 나.

방송작가를 포함해 작가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이 정도도 해당 안 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은 글이 업이 아닌 사람들도 훌륭한 글을 많이 써 내려가는 세상이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막연히 알아갈 때쯤 TV에서 한 다큐멘터리 예고편을 보았다.

어떤 프로그램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눈이 거의 녹은 산에서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영상이었다.

그때 단 한 줄의 자막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청춘, 짧아서 서러운 봄과 같다


그냥 시냇물이 졸졸 흐를 뿐인데...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봄이 시작된 것을 알리는 그림 같은데 그걸 청춘과 연관지은 거까진 그럴 수 있는데

이제 봄이 시작될 듯 말 듯한데, 이제 막 눈이 녹기 시작했는데 꽃도 안 피었는데

짧아서 서럽단다. 그리고 그게 청춘이고 봄이란다.


방송작가. 그중에서도 교양작가는 저런 표현력을 가질 줄 알아야 하는구나

글 쓰는 걸 제법 좋아했던 나도 어쩌면 방송작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방송작가가 되면 언젠가 <인간극장> 작가가 돼서 감동을 줘야지


막내작가 때 선배피디나 작가언니들을 보면

“인간극장 하려면 연차가 얼마나 쌓이면 할 수 있어요? “ 물어봤다.


20대에 물어봤을 땐 30대가 되면 도전해 볼 수 있다고 했다.

30대가 돼서 물어보니 40대가 되면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어느새 (믿기지 않지만) 40대가 됐다.

<인간극장>은 아직도 해보지 못한 로망의 프로그램으로 남아있다.


대신 그 비슷한 프로그램들은 참 많이 했다.

일명 휴먼다큐라고 부르는 장르다.

20년 동안 휴먼다큐 곁을 떠난 적도 멀리 한 적도 거의 없다.

방송작가를 하면서 가장 감사한 부분이다.

이 넓은 세상에 참으로 다양한 사연을 갖고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분들의 이야기에 웃고 울고 가끔은 삶이 우울할 때 그분들을 떠올리면 힘이 났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게 느끼지 않을까.

그러니 감동을 주었던 휴먼 다큐는 아직도 레전드라는 이름으로

유튜브와 SNS을 타고 많은 이들이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글로 소중했던 그날의 만남들을 꺼내 보기로 했다.

내가 만났던 이들이 내게 전해주었던 사람 냄새.

세월이 흐를수록 더 값지게 간직될 이야기들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