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까딸리나에서의 삼박 사일의 일정은 단순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바다에 나갈 준비를 했고, 파도 위에서 '서핑' - 파도 좀 타보려고 오만 노력을 다- 했으며, 한번의 세션이 끝나면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 바닷물이 빠질 때쯤 덜 마른 수영복을 입고 다시 바다로 갔다. 그러니까 바다에서 보내는 시간과 그 전과 후의 과정이 이번 여행에서 한 일의 전부였다. 짜투리 시간엔 숙소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물놀이 후 늘어지는 낮잠을 자고, 파트리시아와 샘과 간식을 나눠 먹으며 몇 마디 나눴다. 그것도 아니면 더 무의미하게, 맥주 한 캔 따서 먹고 해먹에 누워 대롱대롱 흔들렸다.
아, 마침 월드컵 본선 경기가 시작한 시기였다. 레스토랑을 겸한 공용 공간엔 작은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고, 한두명 수영복을 입고 티비에 잠깐씩 집중을 했다. 누군가 축구 중계를 넉놓고 보고 있다치면 자기 국적의 대표팀이 뛰고 있었다. 우린 한국과 스웨덴의 16강전를 그 작은 티비로 지켜봤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너희 국가 대표팀'의 경기력이 좋은지,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는지 물어왔다. 우리는 ... 축구에 열과 성을 다하는 이 중남미 문화권에서 산 이래로 그들과 축구에 대한 깊은 대화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못해 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면 예상과 같이 더 이상 묻지 않곤 했다. ㅎㅎ 대답처럼 경기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다가 한 점 차이로 졌다. 경기에 무심한 척 했지만 한국팀의 패배가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호세네 가족과 우리 커플은 저녁만큼은 함께 모여서 식사다운 식사를 차려먹었다. 디귿(ㄷ)자 구조의 공용 공간의 후미진 한 켠에 아이스박스를 놓고, 4인용 벤치형 테이블 가운데에 아기 샘(과 태블릿!!)도 앉혔다. 개수대도 있고 객실동과 등져 있어서 독립성이 보장되었다. 시끌벅적하게 여행의 하이라이트를 보낼 수 있어 보였다. 호스텔 직원인 빠하리또는 저녁 준비하는 우리 곁으로 와서 널부러져 있던 화덕을 손봐줬다. 모양 잡힌 벽돌 화덕 안에 숯을 쌓아 올렸다. 숯은 착화제나 토치의 도움없이 호락호락하게 불을 품지 않았다. 두두, 호세, 빠하리또. 어린 샘을 제외한 그곳의 모든 남자들이 불 붙이기 미션에 동참했다. 다들 전문가처럼 행세했다.
그러다 탁.
벽등과 호스텔을 밝혀 둔 몇 개의 실외등이 동시에 꺼졌다. 겨우 붙은 숯불의 붉은 빛만 남았다. 정전에 고깃불은 다 붙지도 않았는데 빠하리또와 호세는 신이 났다. 에쏘Eso! 이게 산따 까딸리나지! 라며 소리쳤다. 산타 까딸리나엔 몇 번 와본 듯 반응하는 호세였지만 그도 이번이 첫 방문이었다.
암흑이 덮쳐오면서 빗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렸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바다를 향해 사방이 뚫린 공용시설은 어둠과 빗소리에 파묻혔고, 지붕만이 연약한 인간들를 보호해줬다. 먼 바다에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가지를 치며 갈라지는 세찬 빛줄기, 그 다음 대기를 진동시키는 천둥 소리에 온 감각을 집중시켰다. 우르르르릉. 한동안 말 없이 그 장면을 보던 호세는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너흰 번개쇼 좋아해? 나랑 파트리시아는 좋아해. 라고 물었다. 참 예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두두와 나는 핸드폰 손전등으로 바베큐 그릴과 식탁을 희미하게 밝혔다. 이딸로씨는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커다란 캠핑용 전등을 들고 나타났다.
그림자 없는 서퍼들의 밤
4인용 벤치형 테이블에서 시작한 우리 다섯명의 저녁 밥상엔 손님이 늘어났다. 특히 이딸로씨와 빠하리또는 사흘 밤 저녁을 내리 같이 했다. 또 낮에 몇 마디 나눈 서퍼들이 밤엔 외로운 객이 되어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자리를 잡았다. 게 중에 빠하리또Pajarito(스페인어로 '작은 새')만 유일한 파나마인이었다. 하지만 그를 보면 왠지 떠도는 사람의 적적함이 느껴졌다. 고향 엘 빨마르에 어머니가 있고, 딸도 있다지만, 가족과 고향이 그의 몫 같지 않아 보였다.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이 그의 정처없음을 더 극대화시키는 듯 했다. 호세는 그를 이 호스텔에서 만나자, 뛸 듯 반가워 하며 내게 소개를 했다. 엘 빨마르에서 같이 서프하던 내 친구야, 여기서 있는 지 전혀 몰랐어.
구운 고기와 채소, 샐러드로 조촐한 식사를 하던 테이블을 둘러싸고, 여기 저기서 이야기의 장이 펼쳐졌다. 아기 샘은 시끌벅적한 주변을 조금도 꺼리지 않으면서 묵묵히 그리고 끊김 없이 만화 채널을 보고 있었다. 세살짜리 아이는 어른의 도움 없이 능숙하게 넷플릭스 어플리케이션을 조작했다. 다들 스페인어를 했지만, 파트리시아는 영어를 섞어 썼다. 파트리시아는 베네수엘라 마르가리따 섬의 한 대학에서 영어 교수로 일했었다. 능숙하게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건 그녀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파트리시아는 고향 베네수엘라 마르가리따 섬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야기했다. 대학시절 트리니닫 토바고에서 어학 연수를 하고 런던 연수의 기회도 얻었었다. 이후 대학에서 정교수로 취직했고 탄탄대로를 걸었다. 손가락으로 꼽아도 불과 몇 해 전 일었다. 나라가 어려워지자 고향을 떠나 파나마에 들어왔다. 난민의 신분이 되었다. 그녀는 베네수엘라인들이 파나마인의 일자리를 뺏는다고 생각해 차별적 대우를 받고 있다고 성토했다.
되돌아 보면 파나마에서 역전된 현실이 납득이 어려울 만도 했다. 직업도 가족도 뒤로하고 모국을 떠나야 했던 건 당면한 현실이 절박했고, 그곳에서 미래를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비난의 화살은 무능력한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향했다. 그들은 파나마 영주권이 나오기 전까진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수도 없었다.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를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방랑의 삶을 산다는 건 같지만 이 사회에서 느끼는 이질감은 완전 달랐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나는 우리가 겪는 차별의 경험을 공유했다. 인종차별. - 파나마 시티는 중남미의 다른 어떤 사회보다 훨씬 더 수용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동양인의 외모는 조롱의 코드로 활용되었다. - 동양인을 향해 눈을 찢는 제스쳐를 보이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고 설명을 하자, 호세가 말했다. 너희는 그렇게 생겼잖아.
많은 예시를 들며 설득했지만, 다른 외모를 지적하는 것이 왜 불쾌한지에 대한 정확한 포인트를 짚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외모를 가졌다. 외적으로 눈에 띄는 다름이 없는 것만으로 이질감 없이 무리 속에 들어간다. 하지만 가끔 무리 속의 사람들은 경계 밖의 것들에 대한 인지와 감수성이 둔해지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물론 그에 대해서 아는 한, 그는 어떤 의도나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박에 오히려 내 머릿속엔 두루뭉술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우리 인식 속에 숨겨진 차별적 사고를 어떻게 일깨울 수 있나? 오랫동안 곱씹어 볼 이야기거리였다.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사람, 장소, 환대>에서는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가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사람은 생물학적 인간과 다르다.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의해서 사람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런 과정이 일어나는 사회는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공간의 개념이며, 이 공간을 벗어 났을 때 우리는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증거를 잃게 된다. 따라서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김현경, <사람,장소, 환대>, 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에서)
사회가 바라는 여러 기준 밖에 있다는 것은 다른 구성원들처럼 온전한 사람의 역할을 수행을 하는데 결함이 있다고 여겨진다. 예로 많은 사회가 가진 인종에 대한 편견과 비하의 메시지는 특정 사람이 사회에 접근하기를 막는다. 다른 문화에서 만나는 이러한 종류의 충격은 우리가 이 사회의 외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사회로부터 받아들여 지지 못한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우리가 사람으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회가 허락하는 경계 내에서 관광객 혹은 외국인으로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다 할 때 한편으론 내가 이 사회에 소속되길 진심으로 원할까? 질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가지는 사회에 속하고 싶고, 역할을 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불쑥 불쑥 고개를 든다. 이 나라에 내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재밌게도 산타 까딸리나 언덕에서 밤을 함께 보낸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가 서핑을 즐기며, 모두가 파나마에 거주하는 외국인이었다. 대화는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따로 또 같이, 여기 저기서 제각각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파나마에서 십수년을 살았다느 포르투갈인은 오년 전만 해도 파나메뇨들은 말을 타고 다녔다는 얘기를 덤덤히 했고, 브라질인 이딸로씨는 파나마의 프레콜롬비아 문명과 역사를 술술 읊었다. 그리고 각자의 고향과 나라에 대해 질문을 주고 받았다. 지구 곳곳의 이야기가 한 자리에 모이던 그날 밤, 그들을 보며 나는 파나마에서 우리 삶이 어디로 갈까 생각해 보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