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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삼 Jul 20. 2021

망한 날씨를 기념하며, 셀~카

'3분' 포아스 화산의 크레이터 - 코스타리카의 화산들






불멍 해야지 하고 보니 가짜 화로

문득 눈이 떠졌다. 발 끝으로 따끈따끈한 온기가 느꼈지만, 귀 밑까지 두꺼운 이불을 휘감고 있었다. 침대 끝에는 놓인 온열기가 고산의 냉기까지 물리칠 순 없었다. 장작에 불길이 솟는 이미지가 기똥차게 진짜같이 보이는 화로였다. 내 발꼬락은 불 타올랐겠지만, 지난밤을 생각하면 온도 레버를 더 올리고 잤어야 했다.



핸드폰 버튼을 눌러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일어나도 잠이 섭섭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눈곱을 털어내고, 굳은 몸을 사방으로 비비고 늘리며 게으른 스트레칭을 해본다. 그리고 슬그머니 침대 밖으로 발을 빼꼼히 내민다. 목이 마르는 동시에 소변이 마렵다. 밤사이 누적된 갈증과 뇨기를 느끼며 어그적 어그적 걸었다. 산중의 이른 아침 찹찹한 공기가 화장실에 다 몰린 것 같다. 두 뺨에 서늘함을 느끼며 변기에 앉았다. 좌변기 플라스틱의 온도 차이가 허리춤까지 전해졌다.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이던 시절 살던 우리 집 화장실이 떠올랐다. 중미에서 한국의 겨울을 느끼다니.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객실엔 어둠과 잠꾸러기의 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평소 같으면 다시 침대로 들아가 여유를 부려 보았겠지만, 오늘은 바로 창가로 향한다. 닫힌 블라인드 사이로 틈을 벌려 오늘의 운수를 확인했다.  








정원을 심어놓은 수국과 꽃나무들이 거칠게 흔들렸다. 캐리비안에서 불어오는 바람 따라 구름 한 덩이가 홑겹으로 펼쳐지고는 있었지만 하늘은 눈이 시리게 파랬다. 오늘, 기대를 걸어봐도 되겠는데? 마음속으로 품고 있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몇 개의 타원이 겹쳐진 듯한 거대한 분화구 속에 비취색 칼데라 호수가 평화롭기만 하다. 우리가 묵은 농장형 숙소에서 차를 타고 이십 분 정도만 더 올라가면 그곳에 이를 수 있다. 단, 하늘님께서 우리 바람을 들어주신다면.  



짓궂은 날씨가 오늘 여기 이 여행자의 가슴을 벅차게 혹은 잔뜩 약이 오르게 할 것이다. 지난 우기 동안 무던히 산과 바다를 다녀 보았지만, 이 시기의 하늘 색은 회색이요, 캐리비안의 바다는 캐리비안의 반짝임을 잃었다. 그때의 아쉬움을 보상받겠노라 우린 짧고 소중한 건기 시즌에 맞춰 코스타리카로 날아왔다.










포아스 화산은 코스타리카의 센트럴 밸리 지역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우버 기사는 산 호세를 든든하게 지키고 서있는 기다란 산맥에서 포아스 화산의 방향을 척 가리키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산이라고 자랑했다. 메인 크레이터의 아름다운 호수로 유명하지만, 단순히 미적인 정취를 찾아 이곳으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산 정상의 호수가 증명하는 땅의 잠재된 힘과 그 강력함, 무자비함을 확인한다. 상상처럼 포아스 화산은 근래까지도 활발한 화산 활동을 하고 있는 활화산이다.



2017년 4월, 포아스 화산의 메인 크레이터, 라구나 깔리엔떼(Laguna Caliente)에서 증기 분화가 시작됐다. 고요한 호수가 끓어오르면서 시뻘건 마그마 조각이 튀어나왔다. 300미터의 연기 기둥이 솟고, 분진은 3km까지 멀리 퍼졌다. 국립공원의 보행로와 시설물, 웹카메라는 날아든 바위 조각에 파괴되고, 주변의 숲은 검은 재를 뒤집어썼다. 물론 국립공원은 폐쇄되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공원 폐쇄로 관광 수입이 사라지면서 지역 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포아스 국립공원은 17개월이 지난 2019년 9월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온라인 예약으로 사전에 티켓을 구매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또 남쪽 크레이터 라구나 보또스(Laguna Botos)를 걷는 트레일이 폐쇄하고, 입장객들은 메인 크레이터의 전망대까지로 관람이 제한됐다.




The crater of the volcano Poás in Costa Rica Taken by Peter Andersen 2005



우리는 공원의 가장 빨리 입장하도록 오전 8시 00분의 그룹 1을 예약을 했다. 지열이 올라오는 오후 시간에는 산 정상이 구름에 가려지기 십상이라는 온라인 속 선구자들의 조언을 십분 받아들였다. 공원 입구 처소에서 신분증과 예약증을 보여준 뒤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공원 관계자들은 하나 둘 모이는 첫 번째 그룹의 입장객들을 건물 안으로 일일이 불러들였다. 컴컴한 입구에는 선반 위에 안전모가 정렬해 있었다. 관람을 마칠 때까지 벗지 말라는 당부가 들렸다. 안전모를 쪼여 쓰니 거대한 알껍질을 뒤집어쓴 마냥 어색하다. 콘헤드 같구먼. 모자에 콩콩 땅콩을 쥐어박아봤다.


소규모 공연장 같은 무대 위로 공원 관리자가 올라왔다. 그는 스크린에 지나는 이미지를 배경으로 포아스 화산의 지난 화산 활동과 관람객 안전 수칙을 진지하게 안내했다. 안전모를 쓰고 연기가 솟는 화산의 사진을 보면서도 내가 살아있는 화산에 와 있다는 실감은 없다.




오리엔테이션장의 반대쪽 문으로 헬멧 부대가 쏟아져 나왔다. 마흔 명 정도의 무리는 메인 크레이터로 가는 등반로에서 점차 두 무리로 갈라졌다. 여유롭게 걷는 사람들과 그 흐름 사이를 빠르게 통과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부부도 둘로 나뉘었다. 나는 두두의 손을 빼고 잰걸음으로 걸었다. 인도를 메운 무리를 빠져나왔다. 마음은 크레이터의 호수를 향해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정상의 하늘이 맑길 바라면서.


오르막길의 끝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앞서 가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멈췄다. 저편에서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안타까운 것이 슬금슬금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전망대의 펜스로 곧장 가 달라붙었다. 푸른빛! 푸른빛이 보였다. 희뿌연 배경 속에서 옥빛 색조를 찾을 수 있었을 뿐 그것 형상이 호수라고 판단하기엔 너무 멀었고 경계가 희미했다. 서둘러 카메라를 들었다. 셔터가 닫히는 1/250초의 찰라마다 푸른빛은 회백색의 증기 속으로 깊게 파묻혔다.








단 3분 만에 반경 일 킬로가 훌쩍 넘는 크레이터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느새 옆에 와있던 두두의 눈치를 살폈다. 화를 내고 싶지만 무엇을 불만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에서 당혹스러움이 보였다. 우린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마주쳤다. 이거 너무하네! 화구에서 분출되는 가스 중독을 막기 위해 전망대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20분으로 제한되었지만, 사람들은 관광객으로서의 역할과 목표를 수행하지 못하고 길 잃은 개미처럼 어정 버정 했다.



허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전망대 시설을 기웃거렸다. 20미터 길이의 전망대의 끝은 펜스로 가로막혀있었다. 크레이터의 둘레를 따라 만들어진 공원 산책로가 놓인 길이었다. 2017년 이전엔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분화구가 뿜어내는 가스 기둥을 지켜보는 관람객들로 붐볐을 것이다. 전망대에서 한 뼘 물러난 곳엔 대피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단순한 아스팔트 구조물 내부엔 화학 기호로 보이는 문자와 숫자가 몇 줄 적힌 메모지가 테이프로 달랑 붙여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다 구경한 것 같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애매모호한 포아스 화산 방문기 어느 장단에 맞춰 정리해야 하나 고민이 다. 그러다 얼마 전 주말 일이 떠올랐다. 



크레이터의 디테일








우리는 구나 얄라(Guna Yala, 파나마 구나 민족의 특별자치구)로 들어가는 산간 지역의 어느 언덕배기에서 차를 세운 채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새벽 어스름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여 도시를 떠나왔는데, 캐리비안 해에 가까워질수록 날씨가 험상궂어지고 있었다. 차 안의 우리는 '그만 들어가고 상황을 알아보자'와 '입구에 다 와가니 가서 보자'로 의견이 맞서고 있었다.



그러는 마침 픽업트럭 한 대가 옆을 지났다. 구나Guna 사람이었을 운전자는 우리에게 오늘은 파도가 세차서 배가 뜨지 않는다는 소식을 알려주고 떠났다. 그로써 논쟁은 끝났고,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파나마 시티는 비가 오지 않았다. 나는 소파에 늘어져 앉아있었다. 아침의 해프닝이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회상이 됐다. 나는 묘한 아쉬움이 들었다. 이 찜찜한 기분이 뭘까? 주말 아침잠을 놓쳐서도, 새벽부터 도시락을 만들어 간 부지런함이 아까워서도, 캐리비안의 바다를 보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 게으른 여행자인 나는 소금물에 몸 적시는 대신 집 안에서 뒹굴 수 있어 내심 만족스러웠다.



그 언덕에서 셀카 한 장이라도 찍고 올 걸. 

앨범에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으니, 부지런했던 여행 준비와 창밖의 아침을 지켜보며 드라이브를 즐기던 시간을 무無로 여긴 것만 같았다. 성형 여행은 아니지만 모든 여행의 목적지가 '어느 장소'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아리송한 찝찝함은 여행에 이르지 못한 여정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걸 확인시켜줬다. 여행의 사진은 나를 위해 남기는 트로피였다. 나에게 금상은 못 주더라도 동상 정도는 주고 싶었다. 졌지만 잘 싸웠고, 성공하진 못했지만 실패는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셀카를 남겨야 했다.





어깨에 걸고 있던 카메라를 들고 서성거리던 두두에게,

두두, 우리 사진 찍자~  제안했다.

뭐 어디에서? 뭐를 찍자고?

심통스런 반응을 무시하고 안전바에 몸을 기대고 섰다.

여기 안개에다 대고 찍자! 와, 호수 보이는 것 같은데, 저어 안 보이나? 하얀 안갯속으로 팔을 뻗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전망대에 하나 있는 안내판을 등 뒤로 하고 둘이 함께 사진도 찍었다. 기대가 와르르 무너진 거에 비해 신나게 웃고 있다.









우리가 포아스 화산 크레이터 앞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최근 분화 전 후의 사진이 그려진 안내판을 보면서 안갯속으로 숨은 그것을 상상이라도 해야겠지만,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안내판 속 사진을 들여다봤다. 분화가 일어난 이후의 화구는 인터넷에서 나오는 사진과 달라져 있었다. 기존의 크레이터의 경계가 무너지고, 호숫물은 증발되고, 주변의 식생이 분진에 덮인 것 같다.

문득 활화산 앞에 서서 여행사에서 보여줄 법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유황이 끓고 마그마가 튀어 오르며 '살아있는 지구'를 증명하는 화산에 '멈춘 사진' 속 '아름다움'을 원하는 것이 가당할까. 지금 보고 있는 자연의 형상이 '완성형'일 것이라고 착각한다.


구름에 가린 크레이터 앞에서 나는 무엇을 봤을까? 십 년 뒤에 물어도 '포아스 화산 가서 아무것도 못 봤다'라고 불퉁거릴 것 같다. 그래도 안개 같은 지난 추억의 끝에는 실없이 웃음 터트리며 찍은 사진이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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