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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Aug 21. 2023

산티아고 최악의 날임에도 함께 여서 다행이다

D+14 춥고, 비 오고, 지저분하고, 북적이는 산티아고

이 날이 최악의 날이 된 것은

첫 번째, 춥고 비가 와서

두 번째, 숙소에 베드버그가 나올 것 같아서

세 번째,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이 모든 게 하루에 겹쳐서이다.


23년 5월 9일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 Los Arcos  가는 길.

사실 비가 오는 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우의를 써야 해서 번거롭고, 방수가 안 되는 카메라 때문에 신경을 좀 더 써야 하긴 하지만 오히려 비가 와서 좋은 점도 있다. 해가 없다는 것.

구름이 가득 껴서 해를 가려주면 태양이 내리쬘 때보다 걷기 효율이 43% 정도는 올라간다.(전혀 근거 없는 숫자다)


신발이 젖는 것은 조금 큰 문제다.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면 신발이 질펀하게 젖을 수도 있다. 다음날까지 마르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음 날 신발을 신을 수 없고, 그럼 걷기를 하루 쉬어 가거나 슬리퍼나 샌들 같은 보조 신발을 신고 걸어야 한다. 다행히 오늘은 그 정도로 비가 많이 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신발과 옷이 꽤 젖었는데, 이런 날은 좋은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낮잠을 한숨 푹 자고 싶어 진다. 그래서 숙소가 조금이라도 깔끔하고, 안락하길 기대한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날이었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어플이 하나 있는데, ‘Buen Camino’(부엔 까미노)라는 지도, 숙박 정보 어플이다. 여기서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마을별 숙소 정보이다. 


각 숙소별로 침대는 몇 개가 있는지, 주방은 사용 가능한지, 세탁기가 있는지 등등을 알려주는데, 또 하나 중요한 정보가 바로 숙소의 평가다. 그중에서도 ‘청결도’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두 번의 산티아고에서 모두 베드버그에 물린 나로서는 청결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산티아고 길에서도 숙소를 고를 때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 청결도이다.

'Buen Camino'라는 앱에서 알베르게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길을 걷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아차 하는 순간 우리는 숙소 예약 시기를 놓쳤다. 

우리 부부가 길을 걷고 있는 시기는 5월 초, 팬데믹 이후에 늘어난 수요에 더해, 걷기 좋은 5월은 원래 관광객 성수기라고 한다. 따라서 2~3일 정도는 앞서서 숙소 예약을 해야 하는데, 우리가 조금 방심한 사이에 숙소가 가득 찬 것이다.


오늘 묵을 마을은 Los Arcos라는 곳으로, 앞 뒤로 적당한 마을이 없어 이 마을에 묵을 수밖에 없는데 난감한 상황이었다. 걱정을 하며 숙소에 전화를 돌리던 중, 한 숙소에서 자리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빠르게 예약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숙소의 평점이 심상치 않았다. 5점 만점에 2점. 산티아고 순례길은 어느 정도 고생을 각오하고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숙소 점수를 후하게 주는 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숙소가 낮아도 3점 중반대, 보통은 4~5점대를 형성한다. 그런데 2점이라니, 뭔가 크게 잘못된 점이 있는 것이다.

더욱이 걱정이 된 것은 ‘청결도’ 점수가 가장 낮았다는 것. 청결도 점수가 낮은 것은 베드버그에 물린 사람이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 산티아고에서 베드버그에 물려 고생했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아내까지 같이 있는데, 걱정이 쌓여만 갔다.


우리는 그렇게 비에 젖으며, 검증된(?) 지저분한 숙소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직접 겪기 전까지 함부로 단언하지 말자며, 일말의 희망을 품고서.

평점이 2점인 알베르게도 처음이었지만, 청결도 점수가 1.5점이라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숙소 체크인을 할 때까지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주인분도 나름 친절하셨고, 입구에는 귀여운 강아지도 있었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서면서 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알베르게 앞의 사납지만 귀여운 강아지


체크인을 하는 창고 같은 입구를 지나 작은 마당을 거쳐 계단을 두세 칸 내려갔다. 반지하 높이의 방들이 모여있는 작은 건물은 좁은 복도를 중앙에 두고 양 옆에 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살짝 열린 왼쪽 방의 문 안을 보니 4인실 방 같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원래 창문이 없는 건지 빛은 거의 들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스멀스멀 습기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우리가 묵을 방은 오른쪽에 있었다. 다인실이었는데, 문을 열자 이층 침대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이미 발냄새가 났고, 축축하고 습한 기운이 온 방에 퍼졌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침대였는데, 대부분의 알베르게에서 방수 재질로 된 침대에 일회용, 혹은 매일 갈 수 있는 시트를 제공하는 반면, 이곳은 집에서 사용할 법 한 면소재의 침대보와 이불을 쓰고 있었다. 바로 이런 재질이 베드버그가 살기 가장 좋은 환경이다.


좁은 바에 2층 침대가 꽉 들어차있었고, 공기는 꿉꿉했다.

알베르게 주인이 나가고, 우리는 젖은 바지 밑단을 걷은 채 고민에 잠겼다.

지금이라도 나갈까?


하지만 사람이 못 잘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얼른 씻고 베드버그 약을 뿌리기로 했다. 혹시나 생길 이런 경우를 대비해 베드버그 약을 사놨었다. 

역시나 깨끗하지 않은 화장실에서 급하게 샤워를 하고(몸을 닦는데 화장실 바닥에 타월을 떨어뜨렸다. 버려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침대에 베드버그 약을 뿌렸다. 

아내는 베드버그 약을 뿌리는 것을 싫어한다. 분명 사람한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테니. 하지만 이번에는 아내가 먼저 약을 집어 들었다.

뭔가를 덮으려는 듯, 강한 방향제 냄새가 진동했다.
베드버그 방지 스프레이를 처음 뿌렸다.




그렇게 최대한 짧게 머무르고 싶은 숙소를 벗어나 밥을 먹으러 나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엄청난 인파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가 산티아고 순례길이 맞나 싶을 정도의 인파가 식당에 우르르 몰려있었다.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들어보니 미국에서 단체 여행객이 온 것이라 했다. 


안타깝게도 이번 여행에서 미국 관광객에 대한 편견이 생겼는데, 그 수에 압도된 것도 있었지만, 그들의 예의 없는 행동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Los Arcos에는 꽤 큰 규모의 교회가 있다. 광장에 바로 접해 있기도 해서 순례자들이 많이 들리는 곳인데, 이곳에는 주민들의 미사가 실제로 진행된다. 우리가 갔을 때도 앞 쪽에서 신부님과 대여섯 명의 어린 학생, 그들의 어머니, 그리고 두세 명의 할머니들이 앉아서 기도를 하고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고요한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는 아이들

순례자를 비롯한 여행객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데, 당연하게도 조용히 앉아서 보는 것이 예의이다. 그런데 미국 관광객 그룹이 시끄러운 목소리로 떠들더니 플래시를 켜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교회 내부를 미술관 보듯이 돌아다녔다.


지난 두 번의 산티아고 길에서는 신부 수업을 받는 한국분과 한 번,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프랑스인과 한 번 이 교회를 방문했었다. 나는 종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의 설명을 듣고, 그 고요한 교회 내부에서 미사를 보며 경건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비록 종교 때문에 이 길을 걷는 것은 아니지만, 순례자로서의 경건한 마음만큼은 확실히 생겼었다.

하지만 오늘 교회에서 시끌벅적하던 사람들과 함께 교회에 머물면서 참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꿉꿉한 기운이 감도는 방으로 돌아오면서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비도 오고, 숙소는 지저분하고, 사람들도 북적이는 오늘이 최악의 날임에 틀림없다고. 하지만 그게 마냥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안 좋은 상황이지만, 지금 같이 있고, 나중에 같이 이 순간을 이야기하면 재밌지 않을까, 그런 희망 어린 대화를 나눴다.



2층 침대가 다닥다닥 붙은 좁은 방에는 빈 침대가 없었다. 브라질에서 온 아주머니는 어둠 속에서 파스를 치이이이익 뿌리고 규칙적으로 특이한 소리를 내며 잠꼬대를 하셨다. 꿉꿉한 침대에 누워 침낭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목석처럼 누워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일찍 눈을 떴고, 재빠르게 숙소를 나왔다. 험난했던 알베르게를 겨우 떠난 우리는 서로를 보며 끄덕였다. 이제 웬만한 숙소는 감사한 마음으로 잘 수 있겠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길을 떠났다.


길을 걸은 이래 가장 일찍 숙소를 떠났다.

산티아고는 평화롭고 행복하기만 한 길이 아니다. 

오히려 순례길이라는 이름이 말하듯 어려움이 가득한 길이다. 

어떤 날은 덜 힘들고 어떤 날은 더 힘든데, 어제 같은 더 힘든 날에도 같이 여서 웃어넘길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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