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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Aug 13. 2023

과거의 기억에만 머무르지 말 것

D+13 5년 전에 왔던 최고의 숙소는 지금도 여전히 좋을까?

5년 전, 두 번째 산티아고를 걸을 때는 블로그에 여러 가지 정보를 남겨 놓았다.

그중 하나는 알베르게(산티아고 순례길의 숙소) 평가였다.

위치, 침실, 주방, 화장실의 청결도 등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겨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오늘은 5년 전 그 리스트에서 최고 점수를 기록한 숙소 중 한 곳에 가기로 했다.


블로그에 남겨 놓았던 산티아고 숙소 알베르게 후기



꼭 그 숙소가 있는 마을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크고 작은 마을과 도시들이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에 길을 걷다가 원하는 곳에 멈춰서 숙박을 하면 된다. (최근에는 사람이 많아 계획을 세우고 미리 예약을 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간 곳 바로 전 마을인 에스떼야(Estella)에 머무른다. 실제로 이곳이 규모도 더 크고 숙소도 더 다양하다. 하지만 나는 지난번 산티아고를 걸을 때 에스떼야를 지나 아예기(Ayegui)라는 작은 마을에서 묵었었고, 거기서 최고의 숙소 중 하나를 만난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을 믿고 이번에도 아내에게 에스테야에 머무르지 말고 아예기까지 가자고 적극 주장했다.

그렇게 우리는 에스떼야에서 점심을 먹고 잠깐 쉬었다가 다음 마을, 아예기에 도착했다.

대부분은 Estella에 묵지만, 우리는 2KM 정도를 더 걸어 Ayegui라는 작은 마을로 향했다.


왼쪽은 2018년 여름, 오른쪽은 2023년 봄. 외관은 그대로였다.

아내에게 좋은 숙소를 소개할 수 있어 기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잠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달라진 것들이 보였다.

우선 슬리퍼가 사라졌다. 5년 전엔 입구에 크록스 슬리퍼가 있어 슬리퍼를 따로 챙겨 오지 않은 사람도 자유롭게 슬리퍼를 편한 슬리퍼를 신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신발장은 텅 비어 있었다.

2015년에는 숙박하는 사람을 위한 슬리퍼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팬데믹으로 관리가 어려웠을 텐데 슬리퍼까지 관리하는 사치였을 것이다.


슬리퍼를 주지 않는 거야 중요한 건 아니었다. 

침실은 깔끔했고, 엘리베이터도 있었으니까.


문제는 샤워장과 세탁기 등의 시설이었다. 

샤워장의 타일은 많이 낡아 있었고, 모션 센서로 작동하는 불은 계속 꺼졌다. 

샤워를 하는 내내 쉼 없이 팔을 휘저어야만 했다.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하러 갔을 때는 말문이 막혔다.

손빨래를 할 수 있는 빨랫대는 너무 심하게 녹과 곰팡이가 슬어 가까이 가는 것도 어려웠고, 세탁기 역시 외관이 많이 녹슬어있었다. 세탁기 문의 틈에는 세탁물 찌꺼기가 쌓여있었고, 건조기 역시 많이 머리카락, 먼지 등이 얽혀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고민한 끝에 어쩔 수 없이 빨래를 돌렸지만 처참한 마음이었다.


주방은 아예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혀 있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팬데믹 이후 많은 알베르게의 주방이 사용 금지 되었다.)


사진은 2018년 당시 모습. 미처 사진으로 담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녹슬고 지저분해졌다.


5년 전 이 숙소는 막 지어진 듯했고, 모든 시설이 깨끗하고 잘 정비되어 있었다.

이런 평가가 결코 나만의 생각이 아님은 주방에 있는 방문자들의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알베르게 내부에 있는 방명록


하지만 잘 살펴보면 대부분의 칭찬 글들이 2018년, 2019년인 것을 알 수 있다.

역시나 이 알베르게는 2018년 즈음에 새로 지어져 운영을 하다가 2020년 팬데믹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고 지금은 겨우겨우 운영만 이어가고 있는 상태로 보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내에게 이 방명록을 보라며 열심히 변명을 했다. 2018년 때만 해도 분명 최고의 알베르게였다고. 




아내에게 최고의 숙소를 경험하게 해 주겠다며 데려온 것에 대한 미안한과 동시에, 시간이 바꾼 것들을 새삼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팬데믹이 어떤 흔적을 남기고 갔는지도.


2018년 기억 속 최고의 숙소는 2023년 안 좋은 숙소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경험은 남은 여행 동안 내가 과거의 기억에 너무 몰두하지 않게 해 준 순간이 되었고, 

나의 세 번째 산티아고는 이전의 산티아고와 같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게 했다. 


아내와 함께 온 이번 여행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비롯해 포르투갈,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 여러 여행지가 내가 이전에 왔던 여행지와 겹치게 계획을 했다.

내 나름대로는 나에게 좋았던 곳, 즉 검증된 곳을 다시 간다는 마음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여행의 방해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기간 동안 마치 처음 온 것처럼 여행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여담이지만 그 전 마을인 에스떼야에서 최고의 빠에야를 먹었다.

에스테야에 머물렀다면 그 식당에 한 번 더 갈 수 있었을텐데... 

에스테야에서 만난 어쩌면 스페인 최고의 빠에야





<80일간의 신혼여행>은 매주 월요일 (가끔 수요일에도) 업로드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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