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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Aug 07. 2023

정답과 오답 이외의 삶의 선택지

D+12 오후 3시에 가족이 함께 모여 수다를 떠는 삶

사흘 전에는 여행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심한 체증을 앓았고, 이틀 전에는 소화제를 사기 위해 대도시인 팜플로나에서 5개의 약국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부산스럽게 다닌 탓에 한동안 여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컨디션도 많이 회복이 되어 밥도 편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다섯 군데를 돌아다니며 산 4개의 약 중 잘못 산 3개는 알베르게에 기부했다.


숙소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한 뒤에도 시간이 남아 오랜만에 알베르게 뒤뜰에서 여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정원에 앉아 글을 쓰며 보이는 모습이 문득 낯설고 재밌게 느껴졌다. 

옆 테이블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가족들 때문이었다.


오늘은 손빨래
알베르게 뒤뜰에 있는 한가한 정원


테이블 두세 개를 합쳐 만든 널찍한 테이블에 예닐곱 명의 어른과 초등학교 저학년 이하로 보이는 꼬마 남자아이 한 명, 그리고 꼬질꼬질한 하얀 털을 가진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제각기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서로 다른 이웃 가족끼리 수다를 떨기 위해 모인 자리 같았다. 


일요일 한 낮,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각자의 와인잔에는 와인이 채워져 있었고, 어른들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했다.

혼자 있는 꼬마 아이에게는 핸드폰이나 태블릿 PC가 없었다. 

아이는 심심했는지 혼자 조용히 노래를 부르다가, 누웠다가, 주변을 걸어다녔다.

강아지는 꼬마 아이보다 더 조용했는데, 주인의 의자 뒤에 거의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드문드문 음식이 나오면 환호를 하고 부산스럽게 테이블이 치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페인 사람들은 어쩜 그리 말이 많은지, 음식이 나올 때도 누군가는 항상 무언가를 열성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무척이나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본 적 없는 삶의 방식이자, 삶의 속도였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 주말에 무엇을 했나?

가족끼리 모여서 저렇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언제였지?

한가하게 시간을 보낸 적이 많이 있던가?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국에서의 삶에 여유나, 이웃, 한가함이 끼어들 자리가 많지는 않았다.

주말에는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글을 썼고, 10년도 더 전에 고향을 떠나 서울 살이를 시작한 나는 가족과 만나는 것도 1년에 두세 번 정도였다. 그나마도 시간을 쪼개어 간 탓에 밥만 겨우 먹기 일쑤였다.

그런 삶에 ‘한가함’은 찾기 힘들었다. 일, 야근, 자기계발로 꽉 찬 삶은 이미 과부하였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그마저도 부족한 느낌에 조바심이 들었다.


성장, 부, 안정 등의 키워드가 나를 비롯한 내 주변 사람들의 화두였고, 만나서 하는 대화의 대부분은 재테크, 집, 미래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 삶에 적응하거나 도태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는 항상 자리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삶은 전혀 달랐다. 좋고 나쁨을 떠나 ‘다른’ 것이었다. 그들에게도 물론 미래에 대한 불안, 성장하고 재정적으로 안정되고 싶은 욕구는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이웃과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며 일요일 오후 3시에 정원에 앉아있는 삶을 사는 것에는 어떤 생각과 배경이 담겨 있을까?


저렇게 사는 게 이들에게는 좋은 삶일까?

변화하는 미래에 빠르게 대비를 하지 않아도 될까?

시골 마을이라 불편한 점도 많을 텐데 도시로 가고 싶지는 않을까?

신기함, 흥미로움, 오지랖 넓은 걱정 등등이 한 데 섞여 그들의 소리를 한참이나 들었다.  




‘조승연의 탐구생활’의 한 에피소드에서 해외 경험을 하면 좋은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며 삶의 선택지가 늘어난다는 점을 이야기 한 내용이 있다.

한 나라에서만 살면 하나의 행동 양식이 정답처럼 여겨지고, 그것을 잘 따르느냐 못 따르느냐로 구분되지만, 다른 문화와 삶의 양식을 가진 나라를 경험해 보면 Yes or No(정답 혹은 오답)에서 옵션 1, 2, 3, 4 로 선택지가 넓어진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내가 산티아고 길 위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보고 있는 이 삶의 양식도 누군가에겐(혹은 나에게도) 충분히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 여행에서 아내와 함께 고민하고 싶었던 큰 주제가 ‘어떻게 살 것인가’ 였는데,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선택지들을 하나씩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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