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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Jul 30. 2023

뜻밖의 산티아고 약국 투어

D+10 여행은 ’예상 밖‘의 연속

5월 5일, 하루 동안에만 5개의 약국을 돌아다녔다.


어제 심하게 체기를 느끼고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쏟은 후,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속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어지러움이나 메스꺼움은 훨씬 나았다.

어제 아내는 아픈 나를 보며 오늘 버스를 타고 다음 마을인 팜플로나까지 가자고 못을 박았다.

나도 동의를 했지만 아쉬움은 분명 있었다.


본격적으로 걸은 지는 이제 3일 차, 벌써 버스를 타는 게 못마땅한 마음이 있었다.

더욱이 아내의 부상 때문도 아니고 나의 체기 때문이라니, 민망함도 컸다.

나는 다시 한번 아내에게 천천히 걸어보자는 이야기를 건넸다.

대답 대신 건넨 매서운 눈빛에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입 닫고 팜플로나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다음 마을인 팜플로나로 향하는 마음은 복잡했다.

팜플로나는 산티아고 길에서 처음 만나는 대도시로, 걸어서 들어갈 때의 아름다운 풍경과 설렘을 놓친다는 아쉬움이 컸다.

거기다 아픔도 많이 가셨으니 ‘걸어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그렇게 속으로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으며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우리는 숙소에 먼저 짐을 내려놓고 약국을 찾아 나섰다.

한국에서 제대로 된 소화제를 들고 오지 않아 고생을 했고, 어제 묵었던 곳은 작은 마을이라 문을 연 약국이 없었기 때문에 큰 도시인 팜플로나에서 약부터 사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미션은 약국에서 소화제 사기



미션이랄 것도 없이 근처에 있는 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얼른 사기만 하면 되었다

그다음 소화하기 쉬운 음식을 찾아 간단히 식사를 하고, 숙소에서 쉬는 것이 오늘 할 일의 전부였다.

어려울 건 없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삐그덕 댔다.


첫 번째 약국

마침 숙소 근처에 약국이 하나 있었다.

약국에 들어가기 전 증상을 이야기하고 제대로 된 약을 받기 위해 구글 번역기까지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소화불량, 구역감, 어지러움‘

소화제 쯤이야 금방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영어가 잘 통하진 않았지만 번역된 단어와 배를 쓸어내리는 손짓과 어지러움을 나타내는 표정을 동원해 약을 하나 받았다.


개비스콘(Gaviscon), 한국에서도 유명한 브랜드 아닌가.

됐다! 하고 얼른 결제를 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문을 나와 아내에게 향했다.

“여보, 약 사 왔어!”


그런데 아내의 표정이 영 시원치 않았다.

“개비스콘은 위 보호액 아니야?”


아내는 개스비콘이 지금 나한테 필요한 약이 맞는지 의심을 했다.


그러고 보니 술 먹을 때 먹는 약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표지에 적힌 단어를 번역해 보니 역시나 ‘위산’이란 단어가 있었다.


아.... 잘못 샀구나.


역시나 개비스콘은 소화제가 아니었다.


두 번째 약국

두 번째 시도에는 아내가 동반했다.

첫 번째 약국에는 그 약 밖에 없는 것 같아 다른 약국을 찾아갔다.

혹시나 생길 같은 실수를 막기 위해 추가로 구글 번역기를 돌려놓았다.

‘위산 관련한 약 말고 소화촉진 약은 없나요?‘


역시나 이번에도 같은 약, 위 제산제를 받았다.

바로 번역한 내용을 보여줬다.


놀랍게도 소화제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믿기지가 않아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나의 스페인어가 짧아 더 물어보지는 못했다.


놀랍게도 소화제는 없다고 했다.


소화제 하나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우리는 두 번의 시도에도 소화제를 사지 못해 당황했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만약 오늘 걸어와서 상태가 조금이라도 더 안 좋아졌다면 문제가 커졌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잠깐 벤치에 앉아 작전회의를 했다.

큰 약국, 한국인의 리뷰가 있는 약국을 찾기로 하고 핸드폰을 열심히 들여다봤다.

아내도 나도, 어제 점심 이후로는 아무것도 먹지 못해 몸에 힘도 없고 머리도 핑핑 돌았지만 멀지 않은 곳 두 군데를 더 찾아 다시 길을 나섰다.


세 번째 약국

세 번째 약국은 다행히 내 증상을 이해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줬다.

좋은 소화제가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제조사가 더 이상 약을 납품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약국에 소화제를 대신해서 먹을 수 있는 건강기능식품이 있다며 하나를 보여줬는데, 카모마일 차 성분의 가루 알약이었다.

말 그대로 약이 아닌 소화를 촉진하는 건강기능식품인데, 어제 숙소의 주인이 줬던 카모마일 차와 큰 차이는 없었다.


‘도대체 스페인 사람들은 체하면 어떻게 하는건가!’

하는 큰 의문이 머리를 강타했다.

하지만 별 다른 도리는 없었다. 그 약을 받는 수밖에.


우리는 그렇게 ‘소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카모마일 차의 알약버전을 받아 약국을 나왔다.

카모마일 차 성분의 소화 보조제 밖에 없었다.


네 번째 약국

마지막으로 들린 약국은 규모가 제일 큰 곳이었는데, 한국의 올리브영처럼 화장품이나 샴푸 같은 생활용품을 더 많이 팔고 있었다.

유럽의 Pharmacy는 원래 한국의 약국보다는 올리브영 같은 뷰티&헬스 스토어 역할이 더 크다고 하는데, 이곳이 딱 그랬다.


여기가 마지막 희망이다


못 미더운 카모마일 약을 대체할 제대로 된 약이 있기를 기대하며(사실은 반쯤은 마음을 놓았지만) 약국에 들어섰다.


세 번의 약국 경험이 있었기에, 우리는 빠르게 증상 설명을 하고, 위산 약은 아니며, 건강보조식품이 아닌 좀 더 강한 약은 없는지를 기계적으로 물어봤다.


’그런 건 없다 ‘는 답변을 예상했지만,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고는 약사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모이더니 네 명의 약사가 서로 열띤 토론(?)을 하며 회의를 했다.

그렇게 한 3분쯤 지났을까?

만족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열띤 토론은 하는 약사분들


우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약은 의사 처방을 받아야만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궁금증 하나가 해결됐다. 스페인 사람들은 심하게 체하면 병원을 가서 처방을 받는다.


그래서 제대로 된 약은 없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건기식보다는 조금 더 강한 게 있다고 했다.

우리는 지체할 틈도 없이 그 약을 사겠다고 했다.

그 약은 작은 유리병에 들어있어 좀 더 그럴싸하게 보였다. 위와 장에 같이 작용하는 약이라고 하는데, 큰 상관은 없었다.


다만 가격이 문제였는데, 그전에 산 두 약은 각각 8.79유로, 10.50유로였지만 이 건 25.60 유로로, 한화로 3만 5천원 정도 하는 비싼 가격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좀 더 강한 약이 필요했고, 구매를 했다.


마지막 약국에서 구매한 가장 그럴싸한 약


식후에 먹으라는 안내가 있었기에 일반 밥부터 먹기로 했다.

옵션은 다양하지 않았는데, 죽은 기대 하지도 않았고 죽과 최대한 비슷한 리조또나 스프류를 찾았다.

하지만 리조또는 기름이 많아 부담이 될 것 같았고,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에는 스프를 잘 먹지 않기 때문에 스프를 파는 식당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결국 우리가 찾은 것은 일식당이었다.




잠깐 다른 이야기로, 이 식당의 정체성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이름은 ‘쿵푸 라멘’.

이 집은 중식당인가 일식당인가.

일본인이 보면 상당히 모욕적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이름 쿵푸라멘

아무튼 아내는 소고기 덮밥을 시켜 먹었고 나는 최대한 순한 야채 라멘을 시켜 나는 국물만 먹었다.

너무 힘이 없어 면 한 젓가락, 소고기 한 톨 정도를 먹기는 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게 서러웠다.


음식을 너무 많이 남겨서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할 때 사정을 얘기했다.

내 나름대로는 “맛있었는데 속이 안 좋아서 많이 못 먹었습니다.” 라고 얘기했는데 잘 알아들었을지는 미지수다.

이것이 쿵푸라멘. 진짜 중국 음식 느낌이 나는 라멘이었다.


거의 국물만 먹은 식사를 마치고 약을 먹었다.

가루를 녹여먹는 약이었는데, 얼굴이 찌푸려지는 맛이었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어쨌든 우리의 약국 투어는 일단락되었다.

무려 네 군데의 약국들 돌아다니며 구매한 약은 총 세 개.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약 쇼핑은 네 시간이 넘어갔다.


그런데 이게 끝은 아니었다.

팜플로나는 산티아고에서 몇 안 되는 대도시라 해야 할 일이 조금 더 있었는데,

유심칩 사기, 샴푸 등 생활용품 사기 등이 남았다.


어렵지 않게 유심칩을 사고, 샴푸를 사기 위해 ’엘 코르테 잉글레스‘라는 백화점 지하 마트로 내려갔는데, 거기에 큰 약국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국을 기웃거렸는데, 통로 쪽에 소화 관련 약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내 증상에 딱 맞는 약이 있었다.

가격은 9.95유로.


진작에 여기 와 볼걸... 

샴푸를 사러 간 백화점 지하 약국에서 제대로 된 약을 발견했다.


여행은 ’예상 밖‘의 일로 가득하다.

산티아고는 나에게 꽤 익숙한 곳이고, 아내만 잘 케어하면 된다고 예상했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크게 아팠던 적이 없어서 이번에도 문제없으리라 예상했다.

스페인도 사람 사는 곳인데, 체하면 먹는 약을 쉽게 살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모두 예상 밖이었다.


오늘 돌아다닌 약국의 수는 다섯,

구매한 약의 수는 넷,

약 값은 45유로 이상,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80일간의 신혼여행>은 매주 월요일(가끔 수요일에도) 업로드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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