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낀표 Jul 23. 2023

희생한다는 착각 혹은 자만

D+9 산티아고에서 심하게 체한 날

혹시 점심 식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그러기엔 너무 맛있었는데..)

아니면 먹고 곧바로 오른 가파른 언덕 때문일까?

아니, 실은 3, 4일 전 바욘에서 느꼈던 체증이 이번에 제대로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그땐 KFC 치킨으로 체증을 내렸었는데, 역시나 무식한 짓이었던 거겠지)


아내는 괜찮은 걸 보니 음식이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요즘 들어 계속 긴장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특별히 심한 것도 아니었고, 더욱이 세 번째 산티아고인 만큼 익숙함과 자신감이 넘쳤다.


숙소를 찾느라 땡볕에서 한참을 헤매었지만, 숙소에 짐을 풀고 바에 앉아서 콜라를 마시고 샤워를 하고, 아내와 세탁기를 쓰기로 합의를 본 즈음 까지는 컨디션이 괜찮았다. 하지만 얼마 뒤 그늘 밑 의자에 앉아 종아리만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그 때에 몸이 불편함을 알아차렸다.

속이 이상하게 뒤틀린 느낌이 들고 목 뒤가 뻐근해져 왔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머리가 빙 돌기 시작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아내에게 한숨 자겠다며 침대로 돌아갔다.

계단을 걸어 한 층을 올라갔고, 창가에 자리한 이층 침대 위로 올랐다. 몸이 으슬으슬 해짐을 느끼고 침낭을 푹 덮어썼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졌지만 온몸에서 땀이 송골송골 피어올랐다. 덮으면 덥고 벗으면 추운 침낭을 계속해서 휘적였다.

어지러움은 더 심해져 땅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앉아도 누워도 뇌에는 시끄러운 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때 아내가 들어왔다.

“몸은 좀 괜찮아?”

라는 물음에 나는 괜찮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아내의 표정은 심각해졌고, 곧바로 약통을 뒤졌다.

아내도 갖은 종류의 약을 잘 챙겨 다니는 편이다. 심지어는 ’급X약‘이라 불리는 <스토파>도 직구를 해서 들고 왔다. 하물며 소화제는 당연히 챙겨 다니는 약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된 소화제를 챙기지 않았다.

평소에 활명수를 잘 먹어서 이번에 포로 된 활명수를 들고 오긴 했는데, 효과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아내도 나도 당황했다.

어쩔 수 없이 손을 따보기로 했다. 반짇고리의 바늘을 꺼내어 알콜솜으로 깨끗하게 닦았다.

아내는 원래 소화기가 약해 스스로의 손도 따는 사람이다. 내 등부터 토닥이며 어깨, 팔, 손의 피를 모아 엄지 손가락에 바늘을 한 방 찔렀다.


피가 점만큼도 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아내는 한 방 더 찔렀다.

여전히 나오지 않는 피…

한 방 더, 그리고 한 방 더…


왼손에 네 번, 오른손에 세 번, 도합 일곱 방의 바늘을 맞고 멈춰달라고 부탁했다.

(아픈 와중에도 웃기긴 했다)


두 손가락은 얼얼했지만 여전히 피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피도 안 나올 만큼 체한 걸까.


아내는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후에 들어보니 주변 병원과 응급실 연락처까지 찾아놨다고 했다.)

아내는 우선 알베르게 주인을 찾아갔다. 저녁식사를 예약했었는데 못 먹는다고 말하고 혹시 비상약이 있으면 받아 올 요량이었다.


꽤 시간이 지나 돌아온 아내는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 하나씩을 들고 왔다고 했다.


좋은 소식은 알베르게 주인이 사정을 듣고는 식사비용을 전액 환불해 줬다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는 미리 예약을 하면 그에 맞춰 재료를 사서 준비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환불이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스트가 따뜻한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호스트는 체한 나를 위해서 몇 가지 도움을 권하기도 했다.


안 좋은 소식은 그 도움이 예상 밖이라는 것이었다.

먼저 체해서 식사를 못한다는 말에 대신 피자를 권했다고 한다. 아내는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예상 밖의 음식이 등장해 당황했다. (죽은 기대도 안 했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체했을 때 피자로 내리나?)


또 다른 안 좋은 소식은 체했을 때 먹는 비상약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만자니야(Manzanilla, 카모마일) 차를 따뜻하게 끓여 주었다. 들어보니 속이 안 좋을 때는 다들 이 차를 마신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는 그 마음씨와 정성에 감동했고, 아픈 와중에도 마음은 좋았다.


나는 천천히 그 차를 마셨고,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조금 정신이 들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호스트가 준 차를 마시는 나.


민망함이 컸다.

이번 여행은 아내의 건강과 휴식을 위해 온 것이고, 나는 무조건적인 희생과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여행지도 대부분 나에게 익숙한 곳을 선택했고, 산티아고도 세 번째 오는 거라 내가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맞추고 도와주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하지만 산티아고 길 이틀차에 내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도움을 주기는커녕 아내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 있는 나 자신이 민망했다.


건강은 정말 알 수 없는 거구나,

이 진리를 새삼 다시 깨달았다. 몸 조심 해야지…


동시에 나의 각오가 참 오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만큼 겸손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내도 식사를 하지 않고 내 옆에서 함께 있었다.

1층에서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 저녁 식사를 할 때 까지도 아픔은 이어졌지만, 다행히 밤이 다가오자 몸이 많이 안정되어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 마을은 산티아고 길의 첫 번째 대도시 '팜플로나',

15km 정도만 걸어가면 되는 곳이라 아내에게 "몸이 많이 나았으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고 말했다가 입을 한 대 맞았다.


나는 버스를 타는 것에 군말 없이 따르기로 했다.






<80일간의 신혼여행>은 매주 월요일(가끔 수요일에도) 업로드 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가 물었다. 우리 세탁기 쓰면 안 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