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낀표 Jul 16. 2023

아내가 물었다. 우리 세탁기 쓰면 안 될까?

D+9 잊기 쉬운 ‘상대방의 입장’ (산티아고 순례길)

빨래가 복병이었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우리가 준비해 간 옷은 각각 상의 두 개, 하의 두 개 정도였고, 양말과 속옷도 두 개 씩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빨래를 하지 않으면 당장 모레 입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간소하게 짐을 꾸린 이유는 가방의 무게를 늘리지 않기 위함도 있지만, 내가 경험했던 한 여름의 산티아고는 손빨래를 하고 널어놓으면 4시간 만에 바짝 마를 만큼 강한 볕이 강하기에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걷기 시작한 5월 초의 산티아고는 달랐다. 사실 봄을 선택한 것은 걷기 좋은 날씨였기 때문인데, 다시 말하면 여름만큼 뜨겁고 건조한 날씨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물론 한낮에는 머리가 아플 만큼 더웠지만)

빨래가 생각만큼 빨리 마르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걸음 속도이다.

지난 두 번의 산티아고에서는 걸음 속도가 상대적으로 빨랐다. 12시 전후로 걷기를 끝내고 숙소에 들어와 샤워를 하며 손빨래를 하고 널어놓는 게 일반적인 루틴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아내가 6kg 배낭을 메고 뒤꿈치에 부상까지 입었으니 걷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많이 느렸다.

그러니 숙소에 도착하는 시간도 늦어져 빨래를 말릴 시간도 충분치 않았다.

산티아고에선 빨래가 가장 큰 일거리다.

이런 이유로 뭐든 미리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아내는 빨래로 인한 스트레스를 계속 받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런 스트레스는 산티아고를 걷기 전, 파리 여행 때부터 계속되어왔는데, 파리 여행에서는 심지어 빨래를 널 곳도 마땅치 않아 더 고생을 했었다.

그래도 산티아고 길만 시작하면 문제없을 거라는 나의 말만 믿고 참아왔던 아내가 이 날 숙소에 도착한 뒤 짐을 풀고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 세탁기 쓰면 안 될까?”


너무 진지한 말투에 놀라

“그럼, 쓰면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어?!“

라고 펄쩍 뛰며 말했다. 하지만 한 편으론 아내가 이런 말을 꺼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알베르게 마당에서 아내가 말을 꺼냈다. "우리 세탁기 쓰면 안될까?"


나는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알게 모르게 손빨래를 고집했다.

‘산티아고는 원래 이런 거야’ 하는 꼰대 같은 생각으로 ‘빨래는 샤워를 하면서 손으로 한다’는 기조를 강조했고, 아내는 그런 말을 들을수록 적응을 못하는 스스로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물론 내 나름대로는 아내를 도와준다는 생각이 있었다.

빨래를 널 때 아내가 들고 온 빨래는 내가 항상 한 번 더 짰고(물이 한 바가지 씩 나와 진심으로 짠 게 맞는지 의심했다), 덜 마른빨래가 있으면 내 가방에 매달고 다녔다.


그런데 그런 행동도 내 고집에서 벗어나진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손빨래를 해야 한다는 틀 안이었고, 그럴수록 아내는 나에게 더 미안해질 뿐이었다.


사실 세탁기를 쓰면 안 되는 이유는 없다.

많은 알베르게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구비되어 있고, 가격은 각각 3~5유로 정도로 크게 비싸지 않다.

물론 과거의 나는 이 가격이 무서워서 거의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혼자 여행하는 것도 아니고, 예산이 크게 부족한 것도 아닌데 여전히 과거의 경험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샤워를 하며 빨래를 하면 잘 씻기는 지도 알 수 없고, 샤워하는 곳의 공간이 지저분한 경우도 많아 스트레스라는 이야기를 했다. 또한 자신은 온 힘을 다해 빨래를 짜는데 내가 다시 짤 때 물이 그만큼 나오는 것도 힘이 빠진다고.



아무튼 이 과정에서 큰 갈등은 없었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세탁기와 건조기를 쓰는 것으로 결정했다.

다만, 이 일을 통해 상대방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혹은 내 경험에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갇혀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가 이번에 차분히 이야기하지 않고 좀 더 참았다가 화를 내며 이야기했다면, 우리는 이렇게 아무런 갈등 없이 넘어갈 수 있었을까?


다시 한번 대화의 중요성을 느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세핀과 애니를 찾아 쪽지를 건네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