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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Jul 16. 2023

조세핀과 애니를 찾아 쪽지를 건네는 일

D+8 여행지에서 서로를 돕는 마음과 차오르는 인류애

이 날은 우리가 산티아고를 본격적으로 길을 걸은 첫날이었다.

아직은 아내의 부상이 다 낫지 않았기 때문에 11km 정도만 걸었다. (일반적으로는 하루 평균 20~30km 를 걷는다.)


짧은 거리를 걷고 알베르게(산티아고 순례길의 순례자를 위한 숙소)가 문을 열기 한참 전에 도착한 우리 부부는 건물 앞 벤치에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다리를 쬐던 태양이 점점 뜨거워질 때 즈음 작은 길 건너편에 앉아있던 또 프랑스 순례자 중 한 명이 우리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Do you speak english?


라고 물어보고는 우리에게 부탁이 있다고 했다.


자신들이 같은 프랑스인 할머니 두 분을 위해 숙소를 예약해뒀는데 그분들에게 숙소 이름과 위치를 전달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도 할머니들을 어제 처음 만나 연락처도 없고, 자신들이 먼저 이전 마을을 출발해 기대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들이 꽤 오래 기다렸는데도 할머니들이 나타나지 않아 우리에게 대신 기다렸다가 숙소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미션을 전달해 준 프랑스 순례자들

우리는 어차피 알베르게 체크인을 위해 근처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다.

할머니들을 알아보기 위해 태양이 내리쬐는 벤치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 말고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알겠다는 말을 하자 안도의 비명을 지르더니 우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이 영어를 전혀 못하시니 말로는 전달이 어려울 거고…


다른 일행 한 명이 다가와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결국 우리에게 쪽지를 남겨주겠다고 했다.

노트를 꺼내들고 길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큼직한 글씨로 무언가를 써주었다.

숙소의 주소, 이름뿐만 아니라 (추측컨대) 당부의 말까지, 꼼꼼하게 적은 종이를 공책에게 떼어 우리에게 건네주었다.(종이를 뗄 때 모퉁이를 찢어 일부 내용을 다시 쓰는 불상사도 있었다. 내가 만난 유럽 사람들은 뭔가 엉성한 구석이 있었다.)


그 쪽지를 건네받은 우리 손에는 뭔지 모를 책임감의 무게가 느껴졌다.

고된 하루를 보낸 할머니들의 편안한 밤이 우리 손에 달렸다는.


미안하고 고마운 표정으로 짐을 챙겨 떠나는 젊은 프랑스인 순례자들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되뇌었다.

우리는 안심하고 가라는 의미로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어 다섯 가지 중 하나인 ‘Au revir’(어브와, 헤어질 때 인사)를 외쳤다.

발음의 문제인지,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할머니들께 쪽지를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갔다.


이제 남은 것은 지나가는 순례자 중 그 할머니들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진 단서는 아까 젊은 프랑스 친구들이 알려준 할머니들의 인상착의와 이름뿐이었다.

‘영어를 못하시고 목소리가 크신, 키가 작고 백발의 할머니 두 분. 이름은 조세핀과 애니, 한 분은 핑크색 옷을 입었음’


우리는 그 단서만 가지고 마을의 길목에 앉아 지나가는 백발의 할머니들에게

“조세핀?, 애니?” 를 외쳤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몇 명의 할머니들에게 낯선 이름을 불러댔고, 그게 누구냐는 눈빛에 일일이 상황설명을 해야했다.


골목길에 앉아 지나가는 모든 할머니들께 말을 걸었다.


그래도 조세핀과 애니 할머니를 찾는 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20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 할머니 두 분이 걸어오시는 게 보였다. 백발이었고, 핑크색 옷을 입고 있었다.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며 올 것이라는 설명과는 달리 온 얼굴에 땀을 흘리며 조용히, 하지만 치열하게 걷고 계셨다.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조세핀?, 애니?” 를 외쳤다,

그러자 할머니들은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신다’는 설명에 납득 갈 만큼 활기차고 쾌활한 목소리로

”oui, je suis joséphine” 이라고 화답하셨다.(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이렇게 답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무슨 이야기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영어를 못하시기에 급하게 쪽지를 건넸다.

할머니 두 분은 빠르게 쪽지를 읽으시고는 스페인의 태양보다 밝은 얼굴로 우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우리는 ‘천만에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우리가 프랑스어 단어 5가지 중에 ‘천만에요’는 없었다. 프랑스인에게 도움을 줄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가 받은 작은 미션은 그렇게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할머니들은 기쁜 표정으로 길을 가셨고, 아마도 프랑스 청년들이 예약해 둔 숙소애서 편안한 밤을 보내셨을 것이다.


쪽지를 받고 기뻐하시는 조세핀, 애니 할머니


인터넷에는 ‘설마’ 하게 되는 뉴스기사와 난폭한 댓글들이 넘쳐난다. 인터넷 뉴스를 보고 있으면 이 세상에는 만취자, 범죄자, 방관자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은 인터넷에서 비친 모습과 다르다.

내 가족과 친구들과 직장동료는 뉴스에 나오는 용서받지 못할 자들이 아니다. 물론 나를 힘들고 화나게 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분명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교류하는 순간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클릭과 조화수를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된 이야기가 아닌, 진짜 사람과 사람이 만나 교감하는 순간들.


바쁜 일상에서는 그 교감의 기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회의감도 깊어만 갔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일어난 작은 에피소드는, 여전히 사람들은 서로를 도와주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되뇌게 해 주었다.

우리 부부에게는 인류애가 되살아나는 따뜻한 순간이었다.





이번 글은 제가 순서를 착각하고 지난번에 잘못 올려 삭제했다가 다시 올렸습니다. ^^;

원래 <80일간의 신혼여행>은 매주 월요일(가끔 수요일에도) 업데이트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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