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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Jul 10. 2023

첫날 느낀 산티아고의 현실적인 일들

D+7 지극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산티아고의 모습

내 경험상 이틀차에 도착하는 ‘론세스바예스’는 산티아고의 현실과 마주하는 첫 번째 공간이다.


시작점인 ‘생장 피에드 포흐’에서는 산티아고에 대한 환상, 시작한다는 설렘, ‘그래봤자 길을 걷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 라는 자신감으로 마음이 팽창해 있다.


하지만 첫날 마주하는 1,400m의 오르막은 산티아고가 마냥 예쁘기만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새로운 시작에 두근거리던 심장은 오르막을 오르며 터질 듯한 허벅지에 피를 공급하게 위해 덜컹댄다.

멋진 풍경만큼 높고 지리한 산맥을 오르고 내려 땀범벅 만신창이가 된 채로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한다.


도착한 뒤에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다. 알베르게(순례자를 위한 숙소)를 찾아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해서 널어야 한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빨래를 널어야 말릴 수 있다. 그마저도 비가 오면 다음 날 젖은 빨래를 가방에 매달고 다녀야 한다.

바람에 날리는 빨래를 잡고 있는 순례자
열심히 널었지만 옷에 녹물이 묻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는 말이 있다.


산티아고 길도 멀리서는 보이지 않는 디테일한 현실이 있다.

그런 일상적인 현실을 처음 마주하는 곳이 바로 이틀차의 론세스바예스다.


우리 부부는 론세스바예스부터 길을 시작했기 때문에 체력적인 문제는 없었지만, 이 외에도 여러가지 지극히 현실적인 일들을 마주했다.



드라이어 없는 화장실

90만 원으로 시작해 1년간 세계일주를 했던 것이 나의 거의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다. 따라서 나는 화장실에 드라이어가 있는 숙소에 묵은 적이 거의 없었다.

반면에 아내는 출장으로만 해외를 자주 다녔고, 드라이어가 없는 숙소에 묵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나는 아내가 가지고 있는 숙소에 대한 기본 값을 예상하지 못했다.

산티아고를 시작하기 전 마음의 준비를 위해 아내에게 산티아고에서 있을 어려움에 대해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드라이어가 없다는 사실을 일러준 적은 없었다.


아내는 수십 명이 겨우 세 칸에서 샤워하는 환경도 낯설어했지만,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당황했다.

그리고는 내게 앞으로 갈 숙소에도 드라이어가 없는지 물었다.

안타깝지만 내가 알기론 없다고 답했고, 아내는 체념하며 “생각해보니 산티아고 길에서 드라이어를 찾는 내가 잘못이네”라는 말을 남기고 생각에 잠겼다.

산티아고 알베르게의 화장실에는 드라이어가 없다


숙소예약 전쟁

내가 개인적으로 산티아고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매일매일 걷고 싶은 만큼 걸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100km를 남긴 지점 전 까지는 숙소를 미리 정할 필요가 없었다. (100km 이상 걸으면 인증서가 나오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구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4~5월이 단체 관광객 성수기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팬데믹이 끝났기 때문인지, 시작점인 생장부터 사람이 북적였다.

우리도 생장에서 숙소를 미리 예약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기에 3일 치 숙소를 미리 정했다.

이런 경우 매일매일 변하는 컨디션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우리는 샤워를 하고 빨래를 널고 쉬지도 못한 채 숙소예약에 매진했다.

어플에서 숙소를 확인하고 일일이 전화를 해서 예약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들었다.

숙소예약 전쟁

그런데 더욱 문제는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하지 못한 어르신들이 겪는 어려움이었다.

우리가 숙소 예약을 마치고 마당으로 향하는 길에 한국 어르신께서 혹시 시간이 되면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오셨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산티아고에 네 번째 오시는 어르신 부부였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경우는 처음이라 예약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셨다.


예약을 하려면 전화를 해야 하는데, 전화를 걸면 스페인어가 휘리릭 나오며 전화가 저절로 끊겼다.

옛날에 쓰던 공기계를 들고 오셨는데, 아무래도 핸드폰 설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어 찾아보니 해외에서는 전화를 못 걸게 막아져 있는 상태였다.

우여곡절 끝에 문제를 해결하긴 했지만, 숙소 예약을 온라인으로만 받는 숙소도 많아져 앞으로 어려움이 크실 듯했다.


고맙다며 건조 김치를 주셨다. 도와드린 것에 비해 과분한 물건을 받은 것 같다.


내향형에겐 가혹한 저녁 식사

모든 알베르게가 그렇진 않지만 론세스바예스를 비롯한 몇몇 알베르게에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신청자에 한해서이지만, 론세스바예스는 다른 식당을 찾기 어려워 알베르게에서 저녁식사를 많이 신청한다.


이 저녁식사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는 꽤 큰 낯섦을 준다. 특히 내향적인 사람에겐.


저녁 식사를 신청하면 주는 티켓을 들고 지정된 식당 앞에서 줄을 선다.

시간이 되면 들어온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해 주는데, 테이블은 큰 원형으로, 7~8명이 앉는다.

각 국에서 온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앉는 것이다.


식사는 전식, 첫 번째 식사, 두 번째 식사, 후식까지 총 네 번 음식이 나온다.

전식으로는 스프가 나오는데, 테이블 한가운데 큰 그릇에 있는 스프를 누군가 자발적으로 나눠줘야 한다.


코스로 나오는 식사도 낯선데, 그 와중에 처음 보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둥그렇게 마주앉아 식사를 해야 하는 경험은 누군가에겐 신기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곤혹스런 경험일 수 있다.


아내의 경우는 후자로, 지극히 내향적인 성격이라 많은 낯선 사람들과 있는 것 자체에 큰 부담을 느낀다.

아니나 다를까 식사 자리에서는 “Where are you from”, “What do you do” 같은 대화들이 오갔고, 어색한 침묵이 간간히 자리를 휩쓸고 갔다.

아내는 그 어색함 속에서도 새로운 경험에 최대한 녹아들려고 했다. 물론 남긴 음식의 양으로 보아 소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했지만…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순조롭게 식사가 끝났다.

흥미로운 사람들이 많아 이야기가 생각보다 재밌었는데, 한 미국인은 삼성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신촌에 살았다고 했는데, 산티아고에서 만난 미국인의 입에서 ‘신촌’ 이라는 단어가 나올 것을 상상하지 못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큰 탈 없이 식사가 끝났지만,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앞으로도 매일 이렇게 다 같이 밥을 먹어야 해?“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곤 우리 둘이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어색하고도 낯선 식사자리


이른 취침과 이른 기상

마지막으로, 직장인에게 낯선 ‘건강한 생활습관‘이 있다.

산티아고의 알베르게는 대부분 10시면 소등을 하고 잠에 들고, 늦어도 아침 8시까지 체크아웃을 해야 한다. (실제로 일어나는 시간은 5~6시 정도다.)


야근을 하고, 유튜브를 보다가 12시가 훌쩍 넘어 잠드는 일반적인 직장인의 삶에선 이 이른 취침 시간이 낯설다.

하지만 산티아고에선 ’건강한 생활습관‘에 익숙해져야 한다.


론세스바예스는 이런 낯선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훈련소 같은 곳이다.

커다란 공간에 수십 개의 침대가 늘어서 있는데, 밤 10시가 되면 소등을 하고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누워서 핸드폰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함을 감안하면 핸드폰을 끌 수밖에 없다.


아침 6시가 되면 이미 주변이 부산스럽다. 씻는 소리, 짐 싸는 소리… 최대한 소리를 죽이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혹시나 일어나지 못했더라도 알베르게 직원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적어도 5개 국어의 굿모닝을 성악가 같은 성량으로 우렁차게 노래 부르며 알베르게를 돌아다닌다.

침낭을 말며 시작하는 아침

이렇게 론세스바예스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본격적으로 적응하는 관문 같은 곳이다.

우리도 이제 1일 차, 적응은 이쯤하면 되었고 아내의 뒤꿈치 부상도 많이 나았다.


오늘부터 길 걷기 시작이다…!




<80일간의 신혼여행>

매주 월요일(가끔 수요일에도) 업로드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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