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낀표 Jul 03. 2023

신혼부부의 산티아고 순례길 첫인상

D+6 아내와 남편의 서로 다른 시점

남편의 시점


산티아고 길이 시작되는 프랑스 끝자락의 작은 마을인 생장 피에드 포흐(Saint-Jean-Pied-Port)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이전과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기차역에서 순례자 사무실(산티아고 길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증명서 등을 발급받는 곳)까지 가는 길은 약 10분 남짓, 우리의 앞뒤로 ‘인파’ 라고 부를 만한 무리가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순례자 사무실에 도착하자 우리들이 속한 무리 외에도 이미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사무실 앞에서 웅성이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지금은 쉬는 시간이고, 몇 시간이 지나야 다시 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나의 이전 산티아고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기다리는 동안 숙소 예약을 하기로 했다.

나의 이전 두 번의 산티아고 길에서는 알베르게 예약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고, 이번에도 당연히 아무런 예약 없이 생장에 도착했다.

출장으로만 해외를 다녔던 아내는 예약을 하지 않아 불안해했지만,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큰 소리를 쳤다. 하지만 순례자 사무실 앞의 인파를 보니 나도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길위의 많은 알베르게들이 만석이라는 안내판을 달아두었다.

핸드폰에 깔린 ‘부엔 카미노’ 앱(Buen Camino, 산티아고 길의 지도, 숙소 등의 정보를 담은 앱)을 열어 아무 알베르게에 전화를 걸었다.

“Dos camas para hoy, por favor(도스 까마스 빠라 오이, 뽀르 빠보르)”, 오늘 두 자리 예약을 하려 한다고 말하자 ‘Completo(꼼쁠레또)’, 오늘 숙소 예약이 꽉 찼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 앉아있는 아내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식은땀 흘리며 전화를 돌려보지만..

요즘 산티아고에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우리는 급하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전화를 건 곳도 꽉 찼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난감해지던 그때 아내가 전화를 건 곳에서 두 자리가 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겨우 예약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예약에 성공했지만 숙소 전쟁의 서막이 울리는 듯했다.

나는 이전과 다름에 아쉬움이 느껴졌고, 아내는 벌써부터 숙소 걱정에 스트레스를 받는 듯했다.




그래도 일단 한시름 놓은 우리는 어깨를 누르는 묵직한 가방을 내려놓기 위해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순례자 사무실에서 반대방향으로 3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가는 길에는 꽤 규모 있는 성당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강 위로 놓인 오래된 석조 다리를 넘어야 했다.

5월 초의 생장, 태양은 뜨거웠지만 바람은 선선했다.

그 길을 향해 가면서 나는 뭔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뭔가 익숙한 곳인데…’

당연히 세 번째 방문이니 익숙한 느낌이 들 법도 하지만, 뭔가 더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서자 더 강해졌는데, 좁고 긴 입구와 그 벽에 그려진 산티아고 길의 도시들, 입구를 지나면 나오는 널찍한 로비와 뻥 뚫린 천장, 그 위를 나선형 계단으로 올라가는 구조까지.

나는 아내에게 “알베르게 구조는 다 비슷한가 봐, 내가 저번에 묵었던 곳이랑 되게 비슷하네“ 라고 말하고는 ’생장의 알베르게는 규격이 있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이라 데스크는 비어있지만, 삼삼오오 모여있는 순례자들이 ‘가방은 저기 내려놓으면 된다’고 알려준 덕분에 가방을 놓고 숙소를 나왔다.

이상할 만큼 익숙한 느낌의 알베르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옛날에 산티아고를 걸으며 썼던 블로그 글을 찾아봤다. 그리고 나의 구멍 난 기억력에 감탄 아닌 감탄을 했다.

이 숙소는 내가 지난번에도 묵었던 숙소였다!


심지어 블로그 글은 두 번째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쓴 것인데, 거기에 ’첫 번째 왔을 때도 이 숙소에 왔었는데 신기하다‘는 말이 있었다.

이번에도 숙소를 찾아 헤매다 겨우 온 곳인데, 우연히도 세 번 연속 오게 된 것이다.


우연에 한 번 놀라고, 내 기억력에 두 번 놀랐다.

아내 역시도 그런 우연에 놀라면서도 ‘바보야?’ 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2018년, 두 번째 산티아고를 걸을 때 썼던 블로그 글

기분 좋은 우연에 나는 그제서야 산티아고에 ‘돌아왔다’는 따뜻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곧 시작이구나, 하는 설레는 마음과 함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바(bar)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 아내에게 소감을 물었다.

산티아고 첫 느낌, 어때?


아내의 시점


내가 오랜만에 돌아온 산티아고의 달라진 점에 당황하고, 그대로인 것들에 따뜻함을 느끼고 있을 때 아내는 걱정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가장 큰 걱정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우려였다.

아내는 MBTI 테스트에서 항상 I가 나오는 내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아내에게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이었다. 같이 온 사람도 물론 있었지만, 분명 오늘 처음 봤는데도 벌써 통성명을 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알게 모르게 압박감을 느꼈다. ’나도 저렇게 사람들과 잘 이야기하고 쉽게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동시에 낯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 느낌이 들까 두려워했다.


벌써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순례자들


또 다른 걱정은 ‘산티아고를 제대로 다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우려였다.

아내는 출국 이틀 전에 뒤꿈치를 크게 다쳤는데, 치료를 받을 때도 의사 선생님께 산티아고 길 걷기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회복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 산티아고 출발일을 최대한 늦췄지만, 생장에 도착한 날 까지도 다리를 절면서 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다음날 상태를 보고 바로 걷기 시작할지, 시작점을 다음 마을인 론세스바예스로 옮겨 버스를 탈지 고민했다. 아내는 물론 나도 내심 생장에서부터 길을 걷고 싶었는데, 이는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석대로’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 상태로 6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1,400미터가량의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넘는다 하더라도 상처가 덧나 길을 아예 포기해야 할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떳떳하고 싶다’는 생각이 우리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 둘 다 시작의 설렘만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아내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줄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는 바에 앉아 한참을 이야기했고,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눈치를 보지 않을 것’


——


사실 아내에게 마음에 남는 한 마디가 있다고 했다.

바로 내가 세 번째 가는 알베르게의 주인이 남긴 말이다.


“It’s not a competition. You don’t have prove, even to yourself.”

(이건 경쟁이 아닙니다. 증명할 필요 없어요. 스스로에게조차 증명하려고 하지 마세요.)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줄을 서 있을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뭔가 타이밍이 맞지 상황에 이야기를 해서 감명 깊지는 않았지만, 이 말이 앞으로 길을 걸으면서 계속해서 떠올려야 할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떠올려보니, 내가 이전에 묵었을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땐 참 감명 깊었었는데. 아마도 오랜 시간 만들어진 레퍼토리가 있는데 너무 바쁜 나머지 잘 맞지 않는 상황에 말씀을 하신 것 같다.)


산티아고를 세 번이나 왔다며 놀리는 알베르게 주인 아저씨. 명언 남기기가 특기이시다.


생각해 보면 아내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도, 길을 정석대로 걷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도 모두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보여주려 하고, 증명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길을 걷는 동안 소위 말하는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

가족, 친구들에게 ‘나 처음부터 완주했어’라고 말하고 싶은 허영심,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정작 나에게 맞는 속도와 방식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잊게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피레네 산맥을 버스를 타고 넘기로 걱정했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기 위한 시간이 아닌, 우리가 즐기고 느끼기 위한 시간을 갖자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길을 걸으면서 누군가에게 증명하려 애쓰기보다는 서로에게 집중하며 우리만의 길을 걷자고 결심했다.


증명하려 하지 말기



<80일간의 신혼여행기>

매주 월요일(가끔 수요일에도) 업로드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유 5가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