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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Jun 21. 2023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유 5가지

세 번째 산티아고를 걸으며 정리한 ‘도대체 왜 걸어?‘에 대한 대답

2016년 여름, 2018년 여름 그리고 2023년 봄, 총 세 번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산티아고를 간다고 할 때마다 받는 질문이 있는데, 도대체 왜 거기를 가냐는 것이다.


유럽에 얼마나 볼 게 많은데 거기까지 가서 30일이 넘는 시간 동안 걷기만 하냐,

왜 사서 고생을 하냐,

일시적인 도피에 불과한 것 아니냐,

등등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처음 산티아고 길에 대해 들은 건 2000년대 중반, 15살이었던 나에게는 800km의 ‘순례길’이라는 말 만으로도 큰 로망이 생겼다. 그 무렵 읽었던 파울로 코엘료의 ’ 연금술사‘도 그 로망을 증폭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나에게 산티아고는 뚜렷한 목적이 없는 로망 그 자체였고, 2016년 실제로 길을 걸었을 때 내가 가졌던 환상 그 이상의 경험을 주었기에 두 번째 산티아고도 큰 고민 없이 갈 수 있었다. (대학 생활의 막바지 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산티아고를 준비하면서는 로망만으로 갈 수 없었다.

나에게는 가정이 생겼고, 직업이 있고, 승진을 했고, 그에 따른 연봉 상승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산티아고를 걷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나름의 이유를 찾아 아내와 함께 걷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고, 사람들의 물음 - 거길 도대체 왜 가는 거야? - 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 역시도 마음 한편에 ’그러게, 사람들은 왜 걷는 걸까?‘ 하는 물음표를 달아 놓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며 나름대로 그 답을 정리해 보았다. (정리하고 요약하는 게 일종의 직업병인 것 같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만난 사람들, 산티아고 길 위에서 일하는 분들과 이야기하며 정리한 주관적인 이유이니 가볍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1. 이색 경험/도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유이자, 지금은 많이 퇴색된 이유이다.

2000년대 중반, 혹은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산티아고 길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게 뭐야?’ 라는 반응이 절대다수였다.

그리고 800km를 걸어 성지에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하면 뭔가 새롭고 멋지고 어려운 도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곳이다. 아마 그 사이 산티아고 길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예능(스페인 하숙, god의 같이 걸을까 등), 유튜브 콘텐츠 등이 수두룩하게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팬데믹 이후에는 그 수요가 급증한 것 같다. 주변에 이야기를 하면 하나같이 산티아고를 다녀왔거나, 갈 예정이거나, 걷고 있는 지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따라서 이색 경험/도전으로서의 산티아고는 그 의미를 많이 잃었다.

만약 이런 ‘이색 타이틀’을 기대하고 오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크게 실망할 것이다.

특히 2023년 봄의 프랑스길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그중 한국인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무거운 짐을 메고 몇 백 킬로미터를 걷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아내의 경우 이번 산티아고가 처음이기도 하고, 이 길을 다 걷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인생의 큰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분명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를 가지는 길이다.


다만 몇 km를 걸었는지, 가방의 무게가 얼마였는지 등등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위한 경험으로 생각하고 오려고 한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산티아고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2. 체력증진/운동

이번에 아내와 함께 산티아고를 걷기로 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아내는 일을 하며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건강검진 결과 작은 문제가 발견되어 건강의 중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운동하기 위해 이 길을 걷는 것은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인다.

최소 30일이 넘는 시간을 내는 것이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기도 하고(대학생 때는 방학을 이용하면 되기 때문에 비교적 쉬웠다. 물론 대외활동이나 스펙 쌓기를 포기해야 했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과 비용이 한 번에 나간다는 단점을 제하면 건강을 되찾는 데 산티아고 길 만한 곳이 없다.


1) 걷기 운동의 극치를 맛볼 수 있다.

산티아고 길은 여러 가지 루트가 있다. ’프랑스길‘, ’포르투갈길‘, ’북쪽길‘ 등등인데 가장 유명한 프랑스길이 약 800km 가량이고 다른 길들도 수백 킬로미터 이상 이어져 있다.


’충분함‘ 이상으로 지겨울 만큼 걸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걷는 사람들을 위한 혜택이 즐비하다. 산티아고 길에는 순례자(이 길을 걷기 시작하면 ’크레덴시알‘이라고 하는 증명서를 발급받는다.)를 위한 숙소와 메뉴 등이 따로 있고, 길이 헷갈리지 않게 곳곳에 화살표로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 마을마다 휴식할 수 있는 카페나 바도 있다. 걷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과 시스템이 잘 구비되어 있으므로 맘 편히 걷기만 하면 된다.

 

2) 습관이 될 만큼 충분히 운동할 수 있다.

습관을 만드는 데 21일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미국의 의사 존 맥스웰이 1960년대 출간한 ‘성공의 법칙’에서 주장한 내용)

물론 계속해서 연구가 되고 있고, 개인마다 편차도 크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습관이 만들어지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운동을 하고 몸을 움직이는 습관 역시도 시간이 걸린다. 산티아고 길은 (프랑스길을 기준으로) 짧게는 30일에서 길게는 40일까지도 걸린다.

매일같이 10시 전에 잠들어 아침 6시 전후로 깨어나 20~30km 이상을 걸어야 하는데, 이 정도면 기본적인 근육을 만들고 몸을 움직이고, 부지런해지는 습관을 가질 수 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기에 충분한 시간과 적당한 압박을 받을 수 있다.

지루할 만큼 걷는다.



3) 건강한 식습관을 가질 수 있다.

아무리 운동을 해도 식습관이 안 좋으면 건강해질 수 없다.

‘You are what you eat’ 이라는 말이 있는데, 산티아고에서는 한국의 음식만큼 맛있는 음식이 많지는 않지만 (물론 잘 찾아보면 있다.) 건강한 음식들이 많다.


예를 들어 아침 식사로 가장 많이 먹는 것이 스페인식 계란 오믈렛인 또르띠야인데, 계란과 삶은 감자로 만들어진 건강식이다.

또 다른 아침식사로는 토스트가 있다. 구운 바게트에 생 토마토 페이스트를 바르고 그 위에 하몽을 올린 간단한 음식이다.


점심에는 구운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를 먹고, 샐러드를 먹는다.

샐러드는 상추, 양파, 당근, 토마토 등 야채에 올리브 오일과 식초, 소금으로만 간을 한다. 다른 소스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어떤 샐러드보다 맛있다. (한국에서는 샐러드를 왜 먹는지 이해 못 하던 아내도 스페인에서 샐러드의 맛을 알게 됐다.)


하루에 3만~5만 걸음을 걷고 먹는 게 그런 건강한 음식 밖에 없으니 살이 빠지고 근육이 붙고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페인 음식이 건강하다는 건 세계적으로 유명했는데, ‘2019 건강국가지수’(Healthiest Country Index)에서 스페인이 1위를 차지했다. 음식과 와인이 큰 이유로 꼽혔다.


이런 객관적인 데이터보다 더 강력한 증거가 있는데,

아내의 20년 넘게 앓던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산티아고에서 나았다.

산티아고 길에서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가장 많이 먹게되는 건강한 아침 메뉴들


3. 경험하는 여행지

나는 2015년 10월부터 시작해 1년 동안 세계일주를 한 적이 있다.

여행을 다녀온 뒤 어디가 가장 좋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나는 항상 스페인을 꼽았다.

그 이유를 생각하면 산티아고 길은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경험하는 여행지‘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과수 폭포, 이파네마 해변, 프라하의 성, 파리 등등 멋진 곳들을 많이 갔지만 대부분의 관광지는 사실 기억에 별로 남지 않는다. 심지어 페루에 갔을 때는 마추픽추도 보지 않았는데, 지금까지도 전혀 후회하고 있지 않다.


대신 호주에서 약 7,000km의 로드트립을 했던 기억 6박 7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던 기억, 뉴질랜드와 유럽 전역에서 히치하이킹과 카우치 서핑을 했던 기억들이 소중하게 남아있는데, 아마 내가 직접 만들어낸 상황과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진하게 경험하고 체험한 것이 산티아고 길이다.

온전히 내 힘으로만 길을 걸었고, 내가 걷는 만큼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줄어들었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환대하고 환대받았다. 그 경험은 그 길에서 오롯이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다.


‘나의 산티아고’라는 말이 있다. 길을 걸은 모두가 각자의 경험을 만들어내고 서로 다른 산티아고를 기억하게 된다는 말이다.

관광지에서는 그런 경험이 쉽지 않다. 대부분이 같은 모습을 보고 돌아온다.(물론 감상은 다르겠지만.) 산티아고는 내가 만들어가기 때문에 더 특별해진다.

길을 잘못 들어 말이 안되는 경사를 올랐다.


4. 종교적 의미


산티아고 길은 원래 종교적인 길이다. 성 야고보의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으로 향하는 순례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을마다 성당과 교회가 자리하고 있고, 매 시각마다 종이 울려 새삼 이 길이 순례길이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된다.


또 모든 순례자는 ‘순례자’라는 신분을 얻어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종교가 없거나 다른 사람도 다 똑같이 순례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데, 종교를 떠나 어떤 숭고하고 정신적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뚜렷한 종교가 없지만,

첫 번째 산티아고를 한국에서 신부 수업을 받고 있는 분과 같이 걸었고,

두 번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프랑스 친구와 같이 걸었다.

그들과 함께 걸으며 미사 지내는 방식, 성당 내부 구조물의 의미, 기도하는 모습 등을 보며 걸었기에 그 길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곳곳에 보이는 십자가와 교회들


5. 휴식

마지막으로 휴식, 아내와 내가 산티아고로 온 또 다른 큰 이유이다.

매일같이 고생하며 길을 걷는데 무슨 휴식이냐고 할 수 있지만, 몸은 건강해지고 마음은 비워지는 가장 좋은 휴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산티아고 길에서 하는 것이라곤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한 식사를 하고 길을 걷는 것, 길을 걷다 잠시 앉아 쉬고 다시 길을 걸어 다음 마을에 도착하는 것, 짐을 내려놓고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는 것, 마을 광장의 벤치나 카페에 앉아 시간을 때우다 9시쯤 숙소로 돌아가 잠드는 것이다.


즉, 걷고 먹고 자는 것 밖에 없는 그야말로 단순한 삶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농업 혁명 당시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피엔스 종들의 행복도를 측정한다면 그 이전 시대보다 훨씬 열악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고대 수렵채집인은 후손인 농부들보다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는 일이 적었으며 … 키도 더 크고 신체도 건강했을 가능석이 높다.” - 사피엔스 중


농업 혁명 이후에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인간의 몸이 적응한 방식 (예를 들면 어두워지면 자고, 필요한 만큼 먹는 등)에서 벗어났고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암 발생 원인의 큰 비중도 다름 아닌 스트레스와 신체 항상성에 위배되는 생활 습관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계속해서 움직이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단순한 삶은 최고의 휴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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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다른 유럽 여행지에 비해 절대적으로 저렴한 여행 경비(순례자를 위한 숙소는 대부분 10유로 ~ 15유로, 즉 2만 원 안이며, 식사도 마음만 먹으면 하루 1~2만 원 안으로 해결 가능하다. 교통비는 물론 없다.)

독특한 사람들과의 만남(30일 이상을 걷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순례자라는 이유만으로 받는 따뜻한 환대와 혜택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지만, 위의 5 가지가 내가 생각한 산티아고 길을 걷는 가장 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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