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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Jun 19. 2023

아는 척해서 아내의 흥을 깨지 말 것

D+5 산티아고 순례길, 세 번째 온 남편과 처음 온 아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처음 걸은 건 2016년 여름, 1년 간의 세계일주 중반부였다.

애초에 1년간의 여행을 계획한 이유가 산티아고였을만큼 기대가 컸고, 실제로 걸은 뒤에는 그 기대 이상으로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친 시간이 되었다.


두 번째로 간 것은 2018년 여름, 인천으로 향하던 1호선 지하철이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의 햇볕에 마음이 흔들렸다.

당시 취업을 준비해야 했던 나는 인턴 대신 한복을 입고 800km를 걷는 프로젝트를 기획해 작은 협찬을 받아 여행을 떠났다.

개인적으로나, 취업을 위해서나 더할 나위없이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두 번의 산티아고 모두 내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었고, 앞으로도 기회만 된다면 다시 산티아고를 걸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내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점으로 가는 길목인 바욘(Bayonne)에 도착했다.


좋은 기억이 가득했던 첫 번째, 두 번째 산티아고


하지만 우리 앞에는 큰 위험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위험은 언제든 고개를 들어 우리가 몇 개월을 들여 준비하고, 퇴사까지 하고 온 이 여행을 한 순간에 멈출 수 있다.


그 위험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아내의 부상이다.

아내는 출국 이틀 전에 문 모서리에 뒤꿈치를 찧어 살점이 뜯겨나가는 부상을 입었다.

뒤꿈치는 걸을 때마다 늘었다 줄었다 하는 치명적인 부위여서 피부과 의사 선생님은 우리에게 ‘가서 고생만 하다가 포기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전해주었다.


그만큼 상처는 깊었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아물지 않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초반의 일정을 최대한 여유롭게 잡고 극진히 관리, 치료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바욘에서 산티아고 길(프랑스 길)의 시작 지점인 생장 피에드 포흐까지 바로 가지 않고 하루 더 쉬어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깊게 패인 뒤꿈치 상처


이 문제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위험 요소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한 가지 더 걱정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아는 척’이다.


두 번째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나는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떠났다.

3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여행을 하는 것은 나와 친구 둘에게 다시없을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길을 걷기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따로 걷게 되었다.


걷는 속도의 차이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친구에게 했던 ‘아는 척’이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을 아직까지도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1일 차에는 고도 1,400미터의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 나는 그 길이 힘든 것을 알기에 아침을 거의 먹지 않는 친구에게 잔소리를 했다. 높은 산이 나오니 지금 잘 먹어 둬야 한다고.


이런 류의 ‘스포일러’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이제 곧 와인을 공짜로 떠갈 수 있는 곳이 나온다‘,‘다음 마을에 맛있는 집이 있으니 지금은 건너뛰자’ 같은.


내 나름대로는 미리 알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일러둔 것들이었지만, 분명 친구가 놓치는 것들이 있었다.


성공도 실패도, 편함도 어려움도, 모든 우연이 다 여행의 과정인데 나는 아는 척으로 그 우연의 과정을 빼앗고 있었던 것이다.


10일이 조금 넘은 날, 친구는 다음 마을까지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우리는 따로 걷게 되었다. 싸운 것은 아니다. 다만 친구는 나름대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할 수 있을 만큼 더 걷고 싶었을 뿐이고, 지금도 친구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에는 그때 아는 척을 하며 친구의 경험을 빼앗았다는 미안함이 있다.


그리고 지금 아내와 함께 온 이 여행에서 나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불안함의 정체는 아는 척으로 아내의 경험을 빼앗을까 하는 걱정이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에게는 세 번째 산티아고이고, 분명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강제로 잊을 수는 없다. 그래서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아는 척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것을 줄이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다.


스포일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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