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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Jun 12. 2023

신혼부부의 3박 4일 파리 여행 결산

D+4 많이 걸어 미안한 남편과 낭만 없는 파리 여행 (트라비 포켓)

이번 파리 여행에선 계획했던 것들을 거의 하지 못했다.

원래 계획을 별로 세우지도 않았지만, 3일 내내 이어진 흐린 날씨와 비 때문에 가장 큰 목표였던 베르사유 궁전도 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관광지라곤 3일 차에 간 에펠탑 한 곳 밖에 없게 되었다.

나머지는 라데펑쓰의 쇼핑몰, 공동묘지(페르 라셰즈)였고, 그나마도 아내는 생리통으로 하루를 누워만 있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은 데카트론에 들렸다가 야간버스를 타기 위해 스타벅스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마지막 날 나는 몇 가지 실수를 했다.


데카트론은 파리 20구 너머에 위치했는데, 숙소에서 데카트론까지 가까워 보여 아내와 함께 걸어가기로 한 것이 첫 번째 실수였다. (2.4km, 걸어서 30분 이상 떨어진 곳이다.)

데카트론까지 걸어가면서, 특히 11구에서 20 구로, 20구에서 구의 경계로 옮겨가며 동네의 분위기가 점점 위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라피티와 망가진 차들이 유독 많았고, 길 한가운데 늘어선 야외노점과 북적거리는 사람들은 파리에서 처음으로 불안함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찾아간 데카트론이었지만 정작 사려던 물건이 별로 없어 우의 두 개만 챙겨 나왔다.

북적이는 불법 야외 노점. 파리는 중심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동네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데카트론에서 나온 우리는 맛있는 것을 먹자는 일념하에 구글 지도에서 높은 별점의 햄버거 집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케밥집, 피자집 등등 식당들이 많이 나왔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그 햄버거 집에 빠져 걷고 또 걸었다. 두 번째 실수였다.

그렇게 또 2~3km를 걸어가는 동안 배는 점점 더 고파만 졌고, 우리는 더 예민해졌다.


설상가상으로, 허기진 배를 잡으며 위험해 보이는 길을 걷고 걸어 도착한 식당엔 줄이 길게 서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우리는 그냥 근처에 있는 블랑제리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기로 했다.

파리의 블랑제리는 모두 맛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것이 세 번째 실수였다.

허기진채로 40분을 넘게 걸어간 식당엔 줄이 길게 서 있었다.


근처 빵집에서 산 샌드위치와 케이크 모두 놀라울만치 맛이 없었다.

빵은 푸석했고, 잼의 향은 어울리지 않았다.

파리라고 모든 빵이 다 맛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어제는 공원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게 없어 보이긴 해도 즐겁기만 했는데, 오늘은 처량해 보이기만 했다.

빵을 먹고 있는 데 물청소차가 지나가고, 비둘기가 끈질기게 달려든 건 덤이다.

(비둘기를 쫓다가 어깨 인대가 늘어난 것 같다.)

배고픈 와중에도 맛이 정말 없었던 샌드위치
집요하게 서성이던 비둘기들과 그들을 쫓아내려는 필사적인 노력 (ex. 유튜브에서 황조롱이 소리 틀기)

그렇게 맛도 없고, 운치도 없고, 성가심만 있었던 식사가 끝난 시간은 12시.

우리는 야간버스를 타기 위해 밤 10시까지 시간을 때워야 했다.

파리의 5월은 추웠고, 우리의 예산은 여유가 없었고, 배는 충분히 차지 않았다.


그러다 쌓였던 울분이 터졌다. 하지만 다행히 울분은 화가 아닌 웃음으로 터져 나왔다.

여행 이틀 전에 발을 다친 것, 파리 중심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17구에 숙소를 잡은 것, 심지어 그 숙소에는 주인이 상주하고 거실과 테라스를 쓰지도 못하는 것, 생리통으로 앓아 누은 것, 배를 곯은 채로 위험해 보이는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 무엇하나 수월한 게 없었다. 그래서 웃겼다.


한참을 웃으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늘어놓다가 숙소로 돌아간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하지 말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렇게 짐을 챙겨 버스 터미널 근처의 스타벅스로 향했다.

(구글 지도에 스타벅스의 위치가 잘못 표시되어 있어 또 한참을 헤매야 했다.)

구글 리뷰에도 스타벅스가 표시된 위치에 없어 성난 사람들의 리뷰가 있었다. 실제 위치는 친절한 파리 시민의 도음으로 찾을 수 있었다.

파리 여행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돈 없이 고생하며 여행하는 게 익숙한 내 여행 방식 때문에 아내가 더 힘들어했던 것 같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이어지는 여행에서는 내 방식을 고집하지 말고 아내에게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다음 여행지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

아내와 40일 동안 800km가량을 걸을 예정이다…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하는 야간버스로 파리 여행이 마무리 되었다.


파리 여행 결산

파리 여행 결산

기간: 2023년 4월 26일 ~ 2023년 4월 29일 (3박 4일)

걸음 수: 79,107 걸음 (남편 기준)

쓴 돈: 698.54 유로 / 998,912원 (환율 1유로 = 1,430원)

인당 일 평균 예산: 174유로 / 248,782원

여행지: 라데펑쓰, 에펠탑, 파리 식물원, 페르 라셰즈, 다수의 블랑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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