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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Jun 05. 2023

파리의 공동묘지에서 아내와 죽음을 생각하기

D+3 부부싸움을 줄이는 방법 (페르 라셰즈)

아내와 함께 죽음을 생각하기 위해 파리의 공동묘지인 페르 라셰즈를 방문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내가 의도했던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이번 여행의 계획을 세우면서 버킷 리스트에 제일 처음 넣은 것 중 하나는 ‘페르 라셰즈 가기’였다.

페르 라셰즈는 파리의 공동묘지인데, 어떤 계기로 이곳에 대한 낭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건 2015년 당시 세계일주를 준비하던 당시에 봤던 ’사랑해 파리‘라는 영화였다.

영화 ‘사랑해, 파리’의 에피소드 중 하나에 등장하는 ‘페르 라셰즈’


한 커플이 페르 라셰즈에서 대화를 하다 사이가 말싸움을 한다.(파리에선 공동묘지를 공원처럼 드나드는 것 같다.)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자존심 때문에 따라가지 못하고 고민한다.

그때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에서 오스카 와일드처럼 보이는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자존심 내세우지 말고 어서 여자를 따라가라는 조언을 한다.




‘사랑해 파리’는 여러 단편을 묶은 영화인데, 그중에서도 이 이야기가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실제로 2016년 여행 중 파리에 들렀을 때 페르 라셰즈에 갔었다.


그곳엔 여러 유명인들의 무덤이 있는데, 내가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아 그냥 공원을 한참 동안 돌다 나왔었다. 크게 유명한 곳도 아니고, 걷다가만 나왔을 뿐인데 당시 파리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되었다. 아마도 죽음을 가까이하는 그 나라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일상에서 죽음의 존재를 너무 완벽하게 지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돌이켜보면 주변에서 부고가 있지 않은 이상 죽은 사람의 모습을 볼 일은 거의 없다. 뉴스에선 완벽하게 모자이크 되어 보여지고, 나이가 들어 죽음을 앞둔 분들은 호스피스에서 마지막을 준비한다. 무덤은 기피시설로 분류되어 거주 지역에서 멀찍이 자리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것이 일상에서 거의 완벽하게 분리되어 죽음의 존재를 잊게 된다.


죽음의 존재를 잊는 것에는 부작용이 있다. 그중 하나는 지금 가진 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많은 다툼과 갈등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연인, 혹은 부부간의 싸움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아닌 경우에는) 대부분 사소한 의견차이, 습관차이, 혹은 오해다.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게 되면 그런 작은 것들이 가끔씩 너무 커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때에 상대방의 죽음을 생각하면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내와 다툼이 있을 때 아내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면 내가 화낸 이유가 그렇게 부질없어 보인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그러니까 내가 의도한 바는 아내가 공동묘지를 걸으며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저지르는 사소한 잘못들은 잘 넘겨주길 바라는 것이었다.(쓰고 보니 의도가 불순하다.)


하지만 내 계획은 처참히 무너졌다.

우선 아내는 공동묘지에 큰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내가 가자고 하니 따라오기는 왔는데,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아내의 뒤꿈치 상처가 낫지 않아 넓은 공원을 걸어 다니는 것이 어려웠다. 공원의 바닥은 울퉁불퉁한 자갈로 되어 있었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아내의 아킬레스 건이 늘어나 상처가 조금씩 찢어지는 듯했다.

나는 어떻게든 죽음과 용서를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려했으나, 걸음 수가 많아질수록 아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상가상 배고픔이 아내를 덮쳐왔다.

배고픔은 적신호다.


파리의 공동 묘지 ‘페르 라셰즈’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아쉬움이 커져만 갔다.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조금만 더 걷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내도 좋아해 주길 바라는 이 마음이 바로 집착 아닐까. 죽음을 생각하기 전에 이런 집착을 버리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내 욕심을 내려놓고 페르 라셰즈를 떠나는 수밖에.


다행히 페르 라셰즈 근처에서 블랑제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도 감탄이 나올 만큼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었다. 참치 샌드위치와 치즈 파니니.

공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나눠 마시는데,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순간 행복감이 몰려왔다. 오늘 여행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먹은 샌드위치와 주스


그렇게 나의 불순한 의도는 실패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곳을 빨리 떠나온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나는 한 번의 꽤 큰 부부싸움을 피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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