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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Oct 22. 2023

술 마시고 스페인어 터진 아내

80일간의 신혼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북쪽길


산티아고 길 걸은지 18일 차, 북쪽길 3일 차


북쪽길을 걸으며 느끼는 점은, 북쪽길이 프랑스길에 비해 더 멋있고 맛있고 한적하다는 점이다. (어쩌면 프랑스길은 이미 두 번을 걸어 익숙하지만 북쪽길은 처음 와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바다를 낀 풍경이 주는 압도감은 상당하다. 프랑스길의 풍경 역시 아름답고 가슴이 트이지만, 북쪽길은 다른 매력이 있다. 장관이라고 부를 만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다가 있는 북쪽길의 풍경


북쪽길의 음식이 더 맛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고객의 다양성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길은 오로지 순례자를 위해서만 판매를 하는 식당이 많다. 순례자는 보통 쓰는 돈이 적고, 음식의 많이 사 먹지도 않기 때문에 음식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북쪽길은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 많아 조금 더 비싸지만(체감상 20% 내외 정도) 양과 맛과 다양성이 훨씬 커진다. 북쪽길을 걸으면서 사 먹는 음식들에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분명 같은 메뉴인데도 양과 질이 (조금 과장을 보태) 충격적이게 달랐다.

산티아고 북쪽길의 음식


그리고 북쪽길은 순례자를 보기 힘들 정도로 한적했다. 카페나 알베르게에서 계속 마주치는 몇 명의 순례자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왜 북쪽길을 걷느냐고 물어보면, 많은 수가 프랑스길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소식을 들어서 북쪽길을 걷는다는 대답이 많았다.(물론 여름 성수기가 되면 휴양객으로 숙소가 부족해질 수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이 산티아고 길을 몇 번 걸었던 사람들이었다. 

한적함이 가장 좋다.


이런 장점만 있는 가 하면 물론 그렇지는 않다. 북쪽길의 가장 큰 어려움은 아마도 길의 난이도 일 것이다.

북쪽길엔 산이 많다.

바다를 끼고 난 길이다 보니 산이나 언덕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우리는 프랑스길을 걷다가 넘어와 북쪽길의 중반부부터 걷기 시작했는데도 이미 많은 산을 만났다. 처음부터 북쪽길을 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북쪽길의 초반 2주는 더 험하다고 했다.

물론 한국의 ‘악’산(설악산, 치악산 등) 만큼 험하고 높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 십일 동안 수 kg의 짐을 들고 매일 20~30km 정도의 길을 걸으면 계속해서 피로가 누적된다.


프랑스길을 걸을 때도 나름의 산이나 언덕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걸었다. 아내는 힘들어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북쪽길 3일 차에 접어들자 나도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풍경에 감탄하며 길을 걷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는데, 북쪽길 이틀 차였던 어제는 약 28km 거리를 무려 11시간 동안 걸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것 이상으로 아내는 더 힘겨워했는데, 길을 걷고 나면 거의 탈진하다시피 했다.


그런 상태에서 맥주 한 병은 아내를 꽤나 알딸딸하게 만들었다.

(나는 원래 술이 약해 맥주 한 잔이면 알딸딸 해지지만, 아내는 술을 잘 마실 수 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맥주와 함께 식사를 했다.




오늘은 약 21km 정도를 걷고 꽤 큰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구글맵에서 평점을 보고 엄선한 맛집에 가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인이 하는 피자집이었다.

(이번 여행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피자를 있는 대로 먹어보는 것일 만큼 나는 피자를 좋아한다.)

길을 걷다 쉬는 시간에는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다.


고대하던 피자집에 도착했다.




피자 한 판과 맥주 두 병을 시켰다. 피자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그중 하나가 이번 여행이 아내에게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체력적인 문제와 심리적인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기 위해 이번 여행을 결정했다. 체력적인 측면에서 아내는 기대 이상으로 해내고 있었다. 


한국에서 일상을 살면서 하는 운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떤 날은 일 때문에 바빠서, 어떤 날은 피곤해서, 어떤 날은 게을러져서 운동을 띄엄띄엄하게 되는데, 이곳 산티아고에서는 다음 마을로 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배낭을 메고 길을 걸어야 한다. 그 와중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몸에 건강한 지중해식 식단이 대부분이니, 건강해지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 체력 증진의 목적은 잘 이루고 있는 것 같다고, 아내는 스스로 만족해했다.


하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심리적인 측면이라 함은, 초 중 고 대학교, 그리고 취업과 결혼까지, 쉬지 않고 사회적인 표준에 맞춰 달려온 아내가 가진 두려움이었다. 이 궤도에서 벗어나면 큰 일 날 것이라는. 

우선 몇 개월 간 일을 그만두고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그런 시도는 성공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아내는 낯섦과 더 자주 대면하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더 성장하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생하는 여행’ 경험이 많은 나로 인해서 생각보다 어려움을 겪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심하게 체기를 앓았을 때 아내가 모든 일을 처리해주기도 했다.) 


아내는 낯선 언어와 환경 속에서 당황하고, 그 당황함에 익숙해지고 대범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특히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는 본인도 모르게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 같아 한 편으로는 아쉬움이 든다고 했다.


아내는 이런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너무 심하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걱정을 많이 한다는 점에 대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번 여행을 마치면 그런 부분에서 많이 대범해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격하게 공감을 했다. 극적인 상황에 몰렸을 때 사람이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 나도 몇 번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내가 스스로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 해결이 가능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그런 극한의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여행이 80일을 계획하고 온 것인 만큼, 내게 익숙한 산티아고 길이 끝나면 그 뒤의 여행은 아내가 주도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이야기도 나눴다.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 문제였다.


열심히 이야기를 하던 중 음식이 나왔다. 

먹음직한 피자를 보며, 역시 북쪽길이야… 하는 감탄과 함께 정신없이 식사를 했다.


산티아고 길에서 만난 이탈리아 피자. 스페인의 소시지인 초리조가 토핑으로 올라 가 있다. 양이 많아 남은 조각은 포장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 체크인을 위해 몸을 움직였다.


숙소 체크인은 주로 내가 담당했다. 숙소 주인들이 영어를 못하는 경우가 꽤 많기 때문에 어설프지만 스페인어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내가 나선 것이다. 아내는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왔지만, 뭔가를 충분히 알기 전에는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경향이 있다. 약간의 완벽주의 같은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아내가 앞으로 나섰다. 

누구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는지, 얼마인지, 순례자를 위한 도장이 있는지, 아는 스페인어를 총동원해 말을 걸었다. 


나는 놀라며, 

"웬일이래 갑자기?"

라고 물었다.


"술 들어가니깐 말이 잘 나오네?!"

라고 아내는 당차게 대답했다.


"맨 정신에도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


더듬더듬 막히고 이상한 단어를 쓰더라도 이렇게 부딪히고 나니 별문제 없이 체크인이 끝났다. 역시 문제는 부족한 언어가 아니라 눈치, 걱정, 체면 같은 것들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벗어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눈치, 걱정, 체면 같은 남의 시선

산티아고 북쪽길 Villaviciosa의 숙소. 알베르게가 아닌 호스텔로, 더블베드 기준 50유로였다.
체크인을 위해 앞장 서 가는 아내, 남은 피자가 담긴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스페인어를 쏟아냈다.



술 마시고 스페인어가 터진 아내가 조금은 자신감을 얻었기를,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본인이 원하는 성장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잘 도와야지. 

아니지, 돕겠다고 나서지 않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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