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대방출
아내와 산티아고 길을 걸은 지 17일 차, 프랑스길을 걷다가 북쪽길로 넘어와 걸은 지 2일 차, 신혼여행을 떠나온 지는 24일 차.
오늘은 많은 사진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전해보려 한다.
무엇을 먹는지, 비가 올 때는 어떻게 걷는지, 어떤 곳에서 자는지, 그리고 북쪽길은 어떤 풍경인지 등등…
오늘 걸은 거리는 약 29km. 북쪽길 중반부의 작은 마을 Piñeres(삐녜레스)에서 La Isla(라 이슬라)라는 조금 더 큰 마을로 가는 일정이었다.
알베르게에서 준비해준 아침을 먹었다. 이곳은 숙소비에 빨래 비용과 아침 식사 비용까지 포함된 특이하고도 감사한 곳이었다. 아침 식사의 종류는 알베르게마다 다르지만 빵이나 비스킷, 우유나 오렌지 주스, 과일 정도가 기본이다.
이곳은 바구니 안에 각종 비스킷과 빵이 담겨 있었고, 음료는 냉장고에서 꺼내 자유롭게 먹으면 되었다. 다만 다른 사람이 자는 방에서 먹어야 해서 소리를 안 내고 조심스럽게 먹어야 하는데, 우리는 늦게 일어나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했다.
오늘은 8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에 출발. 보통 순례자들은 6시~7시 사이에 출발하는 편이다. 그래야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다음 숙소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23년 5월의 프랑스길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숙소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더 일찍 출발하고 더 일찍 도착하려는 사람이 많아 5시 전에 출발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북쪽길은 훨씬 여유로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목이 특이했다. 잔디가 펼쳐진 언덕을 올랐는데, 풀을 뜯어먹는 소들의 목에서 종소리가 딸랑딸랑 울렸다.
언덕을 다 오르니 당나귀 발굽을 청소해 주는 아저씨와 그걸 구경하는 순례자들이 보였다. 여유가 넘쳐난다.
북쪽길은 프랑스길과 비교해 마을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길에서는 대다수의 마을이 순례자를 위한 시설(바, 알베르게 등)이 있는 반면, 북쪽길의 마을은 정말 주민이 사는 작은 마을이 많고, 상점이나 바도 전혀 없는 곳이 대다수다. 오늘도 그런 작은 마을을 여럿 지나갔다.
오늘은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더니 결국 비가 조금씩 내기리 시작했다. 가방에 방수 커버만 씌우고 길을 걷던 우리는 처마 밑으로 숨어들어 우의를 꺼내 입는다. 다른 순례자도 곧 합세했다.
이제 조금 큰 마을로 접어들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길이든 북쪽길이든, 들판이나 숲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차도나 공장지대를 지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마을이라고 부르기엔 크고, 도시라고 부르기엔 조금 작은 지역. 그래도 이 정도면 도시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배가 고파와 식당을 찾아본다. 이후에는 한 동안 마을이 안 나올 수도 있어 지금 음식을 미리 먹어 두는 게 좋다.
북쪽길은 프랑스길보다 식당의 선택지가 넓다. 개인적인 경험상 북쪽길의 음식이 조금 더 비싸지만 훨씬 맛있다.
우리 부부는 구글로 맛집을 찾는 것에 점점 능숙해지고 있다.
평점이 괜찮은 작은 바에 들어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나는 마을들은 애초에 전문 음식점으로서의 ‘레스토랑’이 많지 않고, 바(Bar)에서 간단한 샌드위치만 파는 곳이 많다. 이곳도 그런 곳이다.
그런데 여기엔 샌드위치의 종류가 많지 않다. ‘그냥 나갈까?’ 하다가 비도 오고 움직이기 번거로우니 여기서 간단히만 먹고 가는 길에 또 다른 바가 있으면 들리기로 한다.
카페라테의 스페인식 이름인 ‘까페 꼰 레체”와 콜라, 햄치즈 샌드위치와 또르띠야라고 하는 스페인식 계란요리를 하나 시켰다.
놀랐다. 이게 왜 맛있지?
볼품없이 생긴 샌드위치와, 바게트 빵 위에 턱 하니 올라가 있는 또르띠야에서 어떻게 이런 맛이 날까?
힘들어서 맛있게 느껴지는 착각,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지난 2주 동안 프랑스길을 걸으면서 비슷한 음식을 많이 먹었다. 그 맛이 그 맛이었다. 그런데 이거, 진짜 맛있다. 결국 한 개 더 포장해서 길을 걷다 간식으로 먹기로 했다.
잘 먹었다고, 음식이 맛있었다고 한 번 더 인사를 하고 나왔다.
다시 우의를 챙겨 입고 길을 나선다. 밥을 먹는 동안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다시 걸은 지 1시간도 채 안되어 비가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 작은 빨래터가 있어 그 안으로 몸을 피했다.
수십 년, 혹은 100년도 전에 만들어진 빨래터, 그 아래서 떨어지는 비를 보며 잠시 숨을 돌린다. 물을 마시고, 전날 사놓은 달달한 초콜릿이 들어간 과자를 먹는다.
‘좋다’ 하는 감탄만 벌써 열 번째. 우리는 별말 없이 비만 바라본다.
비가 조금 잦아들자 다시 떠날 채비를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북쪽길이 좋은 점은, 그 마을과 함께 바다가 보인다는 것이다. 바다를 보는 게 좋다.
이 마을에는 해변을 따라 음식점들이 몇 개 보인다. 아까 먹은 샌드위치로는 부족하니 맛있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맛있는 해산물 음식점이 있겠지.
이런! 문을 닫았다.
그 옆집도, 그 옆집도.
끝에 있는 식당까지 다 둘러봤지만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아까 포장해 온 샌드위치 하나를 나눠먹는다.
역시, 포장해 오길 잘했다.
그런데 왠지 억울하다. 맛있는 점심을 기대했는데…
이렇게 된 거 다음 마을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로 했다.
다시 구글링…
찾았다. 보기만 해도 입맛이 싹 도는 빠에야집이 있다! 예산이 빠듯하긴 하지만, 한 번은 제대로 된 빠에야를 먹어보기로 했다.
아예 예약까지 해버려야지.
아, 그런데 우리가 가는 시간에는 문을 닫는다고 한다.
크게 실망하고는 체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조만간 먹고 말리라, 빠에야.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 길은 좀 더 험하다. 안 그래도 좁은 흙길을 올라가는 언덕인데, 비가 많이 와 온통 진흙탕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어찌어찌 걷고 있는데 이번엔 웬 문이 나온다.
어, 길을 잘 못 들었나?
‘부엔 카미노’ 앱으로 찾아보니 길은 맞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니, 열린다.
“괜찮은 거겠지..?”
계속되는 비에 신발이 젖기 시작한다. 신발이 젖으면 잘 마르지도 않고 꽤 골치 아파지는데, 우리는 신발이 더 젖기 전에 대책을 세웠다.
등산 스틱을 우의 안으로 넣어서 신발 우산을 만들어 길을 계속 걸었다.
이상한 차림새에 수상한 행동, 누가 보면 의심스럽겠지만 여기 북쪽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상한 모습으로 깔깔거리며 길을 계속 걸었다.
한참을 걸으니 비가 그쳤다. 우의를 입고 계속 걸어도 되지만, 계속된 오르막에 스틱을 계속 들고 있었던 터라 팔도 저리고 몸에 땀이 났다. 귀찮지만 우의를 벗어 배낭에 매달았다.
길을 계속 걷다 보니 식당이 나왔다.
여기서 제대로 된 점심을 먹자.
샐러드와 돼지 내장 요리인 ‘Callos(까요스)’를 시켰다.
돼지 내장 요리라니… 스페인 음식이 우리나라 음식과 비슷한 면이 꽤 보인다. 쌀로 만드는 빠에야도 그렇고.
음식이 나오자 우리는 순간 멈칫했는데, 그 음식의 양과 모양새 때문이었다.
나는 스페인식 샐러드를 정말 좋아한다. 야채에 올리브 오일과 소금, 식초만 뿌려 먹는 샐러드. 이 집은 그런 스페인식 샐러드를 넘어 발사믹 식초에 감자, 고추 등등 양이 정말 푸짐했다.
무슨 샐러드를 이렇게나…
이어 까요스까지 나왔다.
까요스의 빨간색은 우리 입맛을 자극했다. 드디어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역시나 우리의 예상은 빗나갔다. 빨간색은 파프리카 가루일 뿐 전혀 매운맛도 안 날 뿐더러 짭쪼름한 맛도 많이 나지 않았다. 향신료 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우리가 너무 한국 입맛을 기대한 탓이리라.
여기서 먹은 음식은 샐러드, 까요스, 콜라 두 개, 커피 한 잔이었다. 가격은 총 31유로. 확실히 산티아고 길 치고 비싼 편이지만 양을 생각하면 합당하다는 생각이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어제부터 자꾸 마주치던 순례자 한 명이 옆 자리에 앉았다. 독일인인데 스페인에서 유학을 하고, 마지막 학기를 끝낸 차에 산티아고 순례길로 왔다고.
왜 유명한 프랑스길을 안 가고 북쪽길로 왔냐고 물으니, 프랑스길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고 확인해줬다.
식당을 나와 오늘의 목적지인 라 이슬라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해안가를 끼고 펼쳐진 길을 걷는데,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다. 자꾸 걸음을 멈춰 풍경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숙소는 산티아고 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숙소까지 찾아가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럼에도 이곳은 북쪽길에서 쉽게 만나기 힘든 공립 알베르게. 가격 인당 12유로 정도로 싸기 때문에 이곳을 예약해서 왔다.
숙소에 도착하니 7시 정도가 되었다. (날은 아직 밝은데, 스페인의 여름에는 해가 9시가 넘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총 걸은 시간은 약 11시간. 거리는 29km로 아주 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도 오고 중간중간 풍경을 바라보느라 유독 오래 걸렸다.
속소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면 여권과 Credencial(끄레덴시알)이라고 하는 순례자 여권을 낸다. 그럼 끄레덴시알에 도장을 찍어주는데, 이 도장을 쌓아야 다음 알베르게에서 숙박을 할 수 있다. 도장이 없거나 그 간격이 너무 멀면(100km를 하루 만에 이동했다거나) 공립 알베르게에서 숙박이 어려울 수도 있다. 도보로 길을 걷는 순례자를 배려하는 취지이다.
체크인이 끝나면 알베르게 주인이 침대의 커버 시트를 주고 숙소를 안내해 준다.
공립 알베르게는 한 방에 이층 침대가 여러 개 놓여있다. 여기는 정원이 20~30명 정도 되었는데, 샤워기가 하나밖에 없었다. 덕분에 샤워를 하기 위해서 좀 기다려야 했지만 원래 알베르게에서 많은 것을 바라기는 힘들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알베르게와 호스텔을 번갈아 가며 이용하고 있다. 혹시 가족끼리, 혹은 연인끼리 길을 걷는다면 알베르게와 호스텔을 번갈아 사용해보시길.
너무 늦게 도착한 터라 주변의 식당도 문을 닫았고, 멀리 나갈 힘도 없던 우리는 짜파게티 하나를 끓여 나눠먹었다.
그리고 샤워를 하며 빨고 널었던 발가락 양말을 걷었다. 역시나 안 말라있다. 짐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옷가지를 최소한으로 들고 가는데, 숙소에 늦게 도착하면 이런 점이 어렵다. 침대에 널어 자는 동안 마르길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하루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