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하고 평화롭고 따뜻한
아내와 80일간의 신혼여행을 계획하고 떠나온 지 23일 차, 그리고 산티아고 길을 걷기 시작한 지는 16일 차가 되었다.
프랑스길을 걷던 우리는 가장 기대했던 평화로움이 많이 사라진 산티아고 길에 아쉬움을 느꼈다. 사람이 훨씬 적을 것으로 기대되는 북쪽길로 옮겨 걷기로 결심했고, 어제 북쪽길의 중반부에 위치한 한 마을 Llanes(야네스)로 건너왔다.
북쪽길의 첫인상은 아름다웠다. 작은 휴양마을은 넓게 펼쳐진 북대서양을 바라보고 있었고, 뒤로는 길게 늘어선 웅장한 산맥을 끼고 있었다. 마을 곳곳에는 (아마도 휴양객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은) 식당과 카페, 선물 가게가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고, 순례자를 위한 할인이 되는 식당을 찾아 식사를 했다.
그리고 오늘, 북쪽길에서의 첫걸음을 떼었다.
북쪽길에서의 첫날은 ‘충만하다’ 외의 다른 표현을 찾기 어려울 것 같다.
‘넋을 잃고 바라보다’라는 문장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아기자기한 마을을 벗어나자 작은 숲이 나오고, 그 뒤로 해안가를 따라 난 길이 보였다. 바다를 끼고 나 있는 길은 앞으로 구불구불 뻗어 있었고, 옆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는 짙은 푸른색이었다. 넓고, 또 넓었다.
길을 걸으면 절벽 사이에 가려져 있던 바다가 나타났다.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와 아무도 없는 작은 해변, 저 멀리 수평선고, 그 위로 맑은 하늘과 선명한 구름이 자꾸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윽고 작은 산을 올랐는데, 산을 내려오는 길에는 나무 사이로 저 멀리 바다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프랑스길을 걸으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저기 언덕을 넘으면 왠지 바다가 펼쳐져 있을 것 같다는. 북쪽길은 진짜 바다가 있었다. 바다의 존재 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였다. 길을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벅차올랐다.
한참 걸어가자 꽤 유명해 보이는 해변이 나타났다. 아직 5월 중순이라 그런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그 해변을 바라보며 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프랑스길을 그만 걷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많은 사람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북쪽길로 건너오기로 한 가장 큰 이유도 사람이 없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 예상이 틀리면 어쩌지?
걱정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은 적중했다.
프랑스길과 비교해서 북쪽길을 걷는 사람의 수는 10분의 1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오늘은 길을 걸으며 같은 순례자를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 한적함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은 내가 산티아고를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였다. 2023년 봄, 그 여유로움을 북쪽길에서 비로소 찾았다.
길을 걸으면서 또 색다른 장면을 보기도 했다. 해변에 서핑을 배우는 어린 학생들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으로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넓은 해변에서 뛰어놀다가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에 하나 둘 모여 줄을 서는 학생들이 보였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밝았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선생님은 한 구석에서 아이들과 덤블링을 하고 있었다. 거의 비현실적일 정도로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저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우리는 그 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잦았기 때문에 길을 걷는 시간이 한없이 늦어졌다. 그래도 괜찮다는 사실이 좋았다. 여유로웠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숙소였다.
큰 마당과 별채를 가지고 있는 집이었는데, 별채를 알베르게로 쓰고 있었다.
걷는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중간중간 풍경에 넋을 놓는 바람에 꽤 늦은 시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우리를 맞아주는 이들은 숙소 주인의 아이들이었다. 아무리 봐도 주인이나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하기에 너무 어려 보여 물어보니 부모님을 도와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부모님이 나가 있어서 아이들이 숙소를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밝은 얼굴을 가진 아이들의 얼굴을 정말 오랜만에 봤다. 억지로 일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에게 숙소에서 주의할 것을 알려주던 그 아이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가진 돈이 큰 것 밖에 없다고 하니 싱긋 웃으며 자신이 잔돈을 가져다주겠다며 후다닥 달려 나갔다.
곧 잔돈과 함께 큰 바구니를 들고 왔는데, 옷을 담아주면 빨래를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추가금액 없이. 아니, 우리가 해도 되는데, 이렇게 까지… 그런 환대는 이전에 받아본 적이 없었다.
얼마 후 물어볼 것이 있어 그 집으로 갔더니 아이들 세 명이 깔깔 웃으면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실로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너무 놀랍고 미안하고 고맙게도, 후에 우리의 빨래를 건조시켜서 이쁘게 개어 주기까지 했다. 믿을 수 없는 친절이었다.
거기에 더해 마당에는 고양이와 강아지(라고 부르기엔 너무 컸지만)가 있었다.
고양이는 우리가 음식을 하자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랜만의 야외 주방이 있어 라면을 먹었기 때문에 고양이한테 한 입 줄 수가 없었다. 특히 스페인 고양이는 이런 매운 음식의 냄새를 평생 맡아보지 조차 못했을 테니.
강아지는 무슨 이유인지 계속해서 이리저리 쌩쌩 달리더니 결국 아이들에게 끌려가 목욕을 당했다. 그러고는 축축이 젖은 몸을 이끌고 마당에서 쉬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등을 내밀었다. 몸을 쓰다듬어주자 얌전히 있던 강아지는, 내가 쓰다듬기를 멈추자 나를 힐끔 보더니 자신의 몸을 가까이 붙였다. 다시 쓰다듬으라는 소리였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그 젖은 몰을 쓰다듬고 털어주었다.
우리에게 이 숙소는 따뜻함의 원형이자 이데가 같은 곳이 되었다.
이 날을 우리는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북쪽길에서의 첫날은 충만함이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 것 같다.
광활하고 평화롭고 따뜻한, 충만한 하루였다.
<80일간의 신혼여행>은 매주 연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