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길을 걸은 지 12일 차, 지금까지 약 258km가량을 걸어 프랑스길의 세 번째 대도시인 부르고스에 도착했다. 이곳 부르고스는 여러모로 특별한 곳이 될 예정이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이곳이 우리가 걷는 프랑스길의 마지막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북적이는 프랑스길에 아쉬움을 느낀 우리는 며칠 간의 고민 끝에 더 이상 프랑스길을 걷지 않고, 북쪽길로 넘어가기로 결정을 했다.('산티아고 프랑스길 그만 걷고 싶은 이유와 해결책') 여기 부르고스에서 버스를 타고 Llanes(야네스)라는 북쪽길의 한 마을로 넘어갈 예정이다.
두 번째는 부르고스가 먹부림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길의 대부분은 시골 마을이기 때문에 음식의 종류가 대체로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중간중간 나오는 대도시에서는 다양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 지난번 대도시였던 로그로뇨에서는 타파스 먹부림을 하려다가 아내와 싸우고 말았다.('여행하러 온 거지 타파스 맛집 촬영하러 온 게 아니잖아') 당시 싸움의 원인은 피곤한 상태에서 짧은 시간 안에 너무 욕심을 부렸기 때문인데, 이번 부르고스에서는 이틀간 머무르며 여유롭게 맛집들을 순방할 예정이다.
5월 15일, 부르고스 입성!
부르고스에는 먹부림을 할 만한 곳들이 많이 있다.
우선 옛날부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들, 특히 한국인에게 유명한 Wok(웍, 중국 뷔페 형식)이 있다.
길을 걸으면서 먹게 되는 대부분의 음식들은 지중해식 건강식단들 이므로, 가장 생각나는 음식은 뜨끈한 국물, 매콤하고 자극적인 음식들이다.
바로 이 웍에서는 라멘부터 튀김 음식, 초밥, 닭꼬치, 볶음밥 등등 한국에서 먹던 음식과 그나마 비슷한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음식 자체의 퀄리티를 떠나서, 이런 류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행복감이 차오르는 곳이다.
우리의 첫 행선지는 바로 이 웍이었는데, 사실 상호명이 바뀌고 평이 안 좋아져서 갈지 말지 고민을 하기도 했다.(Lin Yang에서 Sushi Mom으로 변경) 하지만 우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반신반의하면서도 식당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우리가 길을 걷고 있는 5월 중순의 산티아고 길은 아직 추울 때가 있는데, 플리스를 입어도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웍에서 주문한 미소된장국과 라멘의 따뜻한 국물은 극락을 맛보게 했다. 퀄리티 낮은 스시도 불평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간장 양념된 볶음밥, 뭔가 이상하지만 어쨌든 맛은 나는 탕수육, 이 모든 음식을 인당 16유로 정도에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성공이었다. (자세한 후기는 여기서)
튀긴 고기라 맛있었던 약간은 이상한 탕수육, 인스턴트 컵라면 맛이 났지만 우리가 딱 원하던 맛의 라멘
메뉴판에 있는 음식들의 번호를 적어 내면 가져다주는 뷔페 방식. 평일 점심 인당 약 16유로(약 2만원)
또 부르고스에는 오랫동안 미슐랭 가이드에 오른 타파스 집이 있다. 이곳은 지난 두 번의 산티아고 길에도 왔던 곳으로, 개인적으로는 로그로뇨에서 실망을 했기 때문에 검증된 맛집인 이곳에 큰 기대를 걸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집의 타파스에는 다른 곳에서 느껴지지 않는 고급스러움이 있었다. 오랜만에 논알콜이 아닌 술을 한 잔 시켜 함께 먹었다.
두 명이서 네 개의 타파스와 와인 한 잔을 시켜먹었다. 가장 맛있었던 것은 미니 햄버거. 별 거 없어보이는데 각 재료의 맛이 황홀했다.
타파스 네 개와 와인 한 잔 13.5유로(약 1.8만 원)
그리고 마지막, 나의 가장 큰 염원인 KFC가 이곳 부르고스에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가장 흔한 식사 메뉴, 치킨이다. 하지만 그 치킨들은 하나같이 건강하게 구워지거나 삶아진 것들인데, 역시나 이런 닭들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영화 ‘집으로’에서 닭백숙을 받은 소년이 그토록 후라이드 치킨을 울부짖은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할머니 생각을 하면 참 마음 아픈 일이지만…)
특히나 나는 KFC 치킨 중에서도 스파이시 맛을 고대하고 또 고대하고 있다. 바삭한 튀김을 뚫고 닭다리 살을 물때 퍼져 나오는 육즙과 매콤한 향, 나는 그 몸에 나쁜 기름과 자극적인 매콤함으로 너무 순해진 내 혀에 기강을 잡아주고 싶었다. 나에게 부르고스는 KFC로 기억될 것이었다.
위의 두 집을 돌고, 마지막으로 가기로 한 곳이 KFC였는데, 이런.. KFC가 생각보다 멀었다. 부르고스 도심에서 차를 타고 외곽으로 조금 빠져나가야지만 갈 수 있는 아웃렛 안에 있었다. 거기까지 걸어가기엔 좀 멀고(산티아고 길을 걷는 동안에는 밥을 먹기 위해 걷는 것에 조금 인색해지는 경향이 있다.) 택시를 타자니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그… 뭐랄까, 순례자라는 이름을 달고 밥 먹자고 택시를 타고 간다는 게.
부르고스의 KFC는 우리가 있던 중심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내는 이미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으니 KFC 같은 치킨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나도 고민 끝에 알겠다며 후라이드 치킨을 파는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도무지 그 어디에서도 튀김 치킨을 팔지 않았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도심에서 후라이드 치킨을 팔지 않다니. 구글 지도에서 식당을 찾고, 치킨이라는 단어만 보이면 전화를 걸어 후라이드 치킨이 있냐고 물었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더구나 식당을 찾는 동안 점심시간이 지나 식당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스페인에서는 식당이 자주, 그리고 많이 쉰다.)
아, 그냥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포기’? 하고는 다시 마음이 들끓었다. 오기였다.
포기라니, 이렇게 그냥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 이상 먹고 싶다 않다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먹은 것을 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어떻게든 KFC로 가보는 게 어떻겠다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제2의 로그로뇨 사태(다툼)가 일어날 것을 걱정하면서.
다행히 아내도 KFC가 먹고 싶긴 하고, 갈 수 있는 방법만 찾으면 가도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음이 불타올랐다. 먹고야 말겠다.
택시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뭐 어때 순례길을 걷는 동안 이동수단을 일절 타면 안 된다는 이상한 생각에 빠질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나는 진짜 ‘순례’를 하는 것도 아닌 것을.
그런데 그다음이 또 문제였다. 스페인에서는 택시를 어떻게 타야 할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는 우버 같은 것이라도 있을 텐데, 부르고스에는 그런 것이 있을까? 아님 그냥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고 타면 되는 것일까?
인터넷으로 한글은 물론 영어로까지 부르고스에서 택시 타는 법을 찾아봤지만 속 시원한 대답은 없었다. 아마 부르고스에서 택시를 타고 뭔가를 먹으러 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이리라.
나는 갑갑한 마음에 부르고스 주민 같아 보이는 사람들을 붙잡고 짧은 스페인으로 택시 타는 법을 물어봤다. 그중 한 분이 택시 승강장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이렇게, 저렇게 가면 광장에 택시 승강장이 있는데, 거기서 타면 됩니다.
나는 스페인으로 어느 정도 말은 할 줄 알지만, 잘 알아듣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 친절한 설명을 완전히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강의 감은 잡고 길을 찾아 나섰다.
10분이 넘도록 헤맸다. 좌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내는 그냥 아무 거나 먹으라는 계시인가 봐, 여기서 간단하게 요기나 하자. 라고 말했다.
아… 그래도 조금만, 조금만 더 찾아보자
내 KFC에 대한 집념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택시를 찾기 위해 부르고스 구석구석을 한참 동안이나 헤맸다.
그렇게 골목골목을 헤매는 중에 하얀색 차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 차의 지붕에는 TAXI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택시!
나는 황급히 그 차를 불러 세웠다.
“혹시 이 택시 탈 수 있나요? KFC에 가고 싶습니다!”
택시 기사인 젊은 여성분은 이 택시는 예약이 되어 있다며, 저기 택시 승강장에 가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택시 승강장을 못 찾아 헤매던 우리였기에, 도대체 거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택시 기사분이 고개를 내밀고 팔을 뻗어 한 곳을 가리켰다. 택시 승강장이었다.
승강장 위치를 알려주시는 기사님
찾았다!
아내와 나는 하이파이브를 하고, 택시 기사분께 감사인사를 전하며 비로소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정말 광장 한 가운데 떡하니 택시 승강장이 있었다. 이 걸 왜 못봤었지?
마침 택시 한 대가 있어 후다닥 탄 우리는, 드디어 그 이름을 말했다. K.F.C.로 가주세요.
택시를 타고 움직이니 먼 거리도 금방이었다.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걸은 게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걷고 싶어서 걷는 거니깐.
택시를 타니 뭔지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잡생각은 그만하고, 아웃렛으로 들어가 KFC로 향했다.
KFC는 도시 외곽의 아울렛 안에 있었다.
반가웠다. 우리나라 브랜드도 아닌데, 후라이드 치킨의 냄새가 참 그리웠다.
다만 키오스크에서 스파이시라는 단어를 찾지 못했는데, 가만 보니 Malditos(말디또스) 치킨이라는 메뉴가 보였다. 검색을 해보니 ‘저주받은’이라는 뜻이었다. 이거다. 네가 매운 치킨이구나. 그래봤자 스페인에서 매운맛이라면 큰 기대는 없지만.
'저주받은'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나온 스파이시 치킨, 한국인 입맛에는 '뭘 이정도로' 이지만, 스페인에서 먹었던 왠만한 음식보다 매운맛이 확실히 더 느껴졌다!
이곳 KFC는 특이하게 닭 봉과 윙으로만 구성된 메뉴가 있었다. 버킷 한가득 고소한 튀김향을 내는 후라이드 치킨이 담겨왔다. 그리고 드디어 그중 한 조각을 입에 갖다 대었다.
따뜻한 후라이드의 바삭함, 육즙, 그리고 예상보다 매콤한 끝맛!
제대로 찾았다. 고향의 맛.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몇 조각을 흡입하듯 먹고 정신을 차렸다.
집념의 KFC를 먹고야 만 것이다.
기쁨의 악수
아내는 허기가 달래지자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집념에서 뭔가가 느껴졌다고.
아내는 그동안 못 할 것 같은 것은 집착하지 말자라고 포기해 왔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KFC 결국 먹어내고야 마는 것을 보며, 어쩌면 본인이 무던하다고 했던 것들이, 결국에는 열심히 하고 실패했을 때의 민망함을 피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
고작 치킨을 먹으면서 하기에는 너무 진지한 이야기인 것 같았지만, 나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지나친 집착과 집념이, 어떤 때에는 성취할 수 있는 원동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행을 하며 아내의 무던함과 여유로움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주로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내가 나의 집념을 보고 무언가를 느꼈다니.
우리 부부는 서로 다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점에 이끌리기도 했지만, 살면서, 특히 여행을 하면서 그 점 때문에 서로를 이해 못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차이도 서로 배워가며, 맞춰가며 함께 살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