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파스 맛집 5군데 후기, 그리고 아내와 다툰 이야기
80일간의 신혼여행을 계획하고 떠나온 우리 부부, 여행을 떠나온 지 15일 차,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지 8일 차에 처음으로 다툼이 있었다.
타파스 맛집에서였다.
오늘은, 출국 전 다친 아내의 뒤꿈치 회복을 위해 20km 미만으로만 걷던 우리가 처음으로 28km를 걸은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전 날 최악의 숙소에 묵었던 터라 컨디션도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시골 마을만 걷다가 오랜만에 로그로뇨(Logrono)라는 대도시에 가는 날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맛있는 걸 먹을 생각에 들떴다. 이 도시는 타파스라는 스페인 음식으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이다.
8시간이 넘게 길을 걷고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고픈 배를 부여잡고 숙소를 나와 타파스 바로 향했다.
내가 심하게 체한 뒤로 맘 편하게 식사를 했던 게 언제였던가. 이제는 몸도 다 나은 것 같고, 작정하고 먹어 볼 생각이었다.
더욱이 나는 길을 걸으면서 여행 기록용으로 영상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타파스 맛집 소개 영상을 찍어볼 생각이었다.
타파스(Tapas)는 스페인어로 덮개(Tapa)에서 나온 말로, 스페인 남부 지방에서 술잔에 벌레나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뚜껑처럼 바게트를 올려 두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그 바게트 위에 치즈나 해산물 같은 음식을 얹어 먹었는데, 그게 하나의 안주 식문화이자 음식의 종류가 된 것이다. 즉, 타파스(혹은 지역에 따라 핀초스(Pinchos)라고도 부른다.)는 간단한 안주 음식을 말한다.
개당 가격도 2~3유로 정도라 다품종 소량 취식(조금씩 여러 음식)을 사랑하는 나에게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음식이다.
우리나라의 닭갈비 골목처럼, 로그로뇨에는 타파스 골목이 유명하다. 한 곳에서 한 두 가지 정도의 메뉴만 먹으며 식당 두 세 곳을 돌아다니자고 마음먹었다.
그때까지는 아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내 눈에 감도는 은은한 광기를.
시작은 골목의 초입부에 있는 곳이었다.
깔끔하게 생긴 내부 인테리어는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이 조금 더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곳에서는 순대튀김, 크로켓, 닭튀김 세 가지 타파스를 먹었다.
순대튀김은 정확히 말하면 Morcilla(모르시야)라고 부르는 선지로 만든 소시지를 튀긴 것인데, 한국의 순대와 생김새는 얼추 비슷해도 맛은 다르다. 선지로만 만들어서 그런지 식감이 건조하고 푸석한 느낌이다. 물론 맛있게 만드는 곳은 고소한 맛이 잘 살아있는데, 여기서 먹은 모르시야 튀김은 푸석한 느낌이 너무 강했다.
크로켓은 스페인어로 Croqueta(크로케따)라고 부르는데, 안에는 버섯이 들어가 있었다. 크림치즈 같이 짭쪼롬한 맛을 기대했는데, 순하디 순한 맛이었다.
닭튀김, 역시 치킨만이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갓 튀겨진 순살 치킨은 부드럽고 따끈따끈했다. 간도 적당해서 같이 나온 데리야끼 소스를 굳이 찍어먹을 필요도 없었다.
치킨은 맛있게 먹었지만, 전반적으로 기대에 비해서는 실망스러운 맛이었다.
우리는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타파스 세 개, 콜라 한 잔 : 10.9유로(약 15,000원)
두 번째 타파스 집은 조금 더 신중히 골랐다. 골목의 거의 끝까지 걸어가며 어떤 집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사람이 북적이는 가게들을 눈여겨봤다.
사실 이때부터 아내의 안색이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난생처음으로 하루에 28km를 걸은 아내는 쉬지도 않고 밥을 먹으러 나온 것만으로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 침울한 기운을 나는 느끼지도 못한 채 골목을 누볐고, 길 한가운데서 10분이 넘게 구글 지도의 평점까지 살펴가며 후보지를 세 곳을 골랐다.
그중 가장 가고 싶은 곳 ‘Angel(앙헬)’이라는 곳은 브레이크 타임이라 저녁에 다시 오기로 했다.
나머지 두 옵션 중 조금 더 허름해 보이는 집에 가기로 했다.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것은 작고 동그란 빵에 제육볶음 같은 빨간 고기가 올라가 있었고, 그 위에 톡 하면 터질 것 같은 노른자가 올라간 타파스였다. 나는 단박에 그 음식을 골랐고, 아내는 오징어 튀김인 Calamari(깔라마리)를 주문했다.
제육볶음 같은 고기는 알고 보니 스페인식 소시지인 Chorizo(초리조)였다. 제육볶음의 매콤 달달한 맛을 기대했던 나에게는 짭짤하기만 한 그 맛이 실망스럽게 느껴졌다.
반면 깔라마리는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튀김옷이 약간 두껍긴 했지만 오징어는 부드러웠고, 레몬을 뿌렸을 때의 상큼한 향은 다른 소스도 필요 없게 만들었다. 깔라마리 덕분에 오랜만에 맥주도 한 잔 할 수 있었다. 논알콜 맥주였지만.
두 번째 집을 나왔을 때 우리는 이미 배가 어느 정도 부른 상태였다. 아내는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는 눈치였고, 이만 숙소에 들어가자고 이야기했다. 그때 그만 멈추고 지친 몸을 뉘었어야 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촬영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스쳐 지나갔다.
맛있다고 하는 집을 가봤으니, 평점이 좋지 않은 곳은 어떨까?
재밌는 영상이 될 것 같았다.
골목을 둘러볼 때 유독 사람이 없는 식당이 있었는데, 거기에 가보고 싶었다.
나는 맑은 눈의 광인이 되어 아내의 상태를 외면하고 달래는 말로, “딱 한 가지만 먹어보자”며 식당으로 끌고 갔다.
초리조 타파스, 깔라마리, 논알콜 맥주 한 잔 : 13.5유로(약 18,000원)
깔끔하고 널찍한 내부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시간이 벌써 3시쯤이니 그럴 만도 했지만, 다른 식당에는 아직 사람이 꽤 있었기 때문에 맛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졌다. 특히 너무 깔끔한 인테리어는 왠지 모르게 믿음이 안 간다. 골목에 사람이 붐비는 식당들은 하나같이 낡고 오래된 느낌이었다.
진열대에는 먹음직해 보이는 음식들이 꽤 있었는데, 나는 소고기 찜 요리를 시켰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고 소스도 진해 보였다. 생각보다 맛있을지도?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아내는 아무 음식도 주문하지 않았다.
나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카메라에다 열심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왜 이 가게를 왔는지, 어떤 음식을 시켰는지 등등. 그동안 아내는 말없이 허공만 보고 있었다.
내 나름대로는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시간을 기록해 보려고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왜 도와주지 않는지 불만이 생겼다. 결국 나도 아내에게 서운한 마음을 조금 드러냈다.
서운한 마음은 불친절한 말투가 되어 날아갔고, 이내 차가운 말로 되돌아왔다.
싸움이라고 까지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갈등이었고, 음식이 올 때까지 우리는 침묵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음식을 데워서 가져다주었다. 나도 배가 꽤 불렀기 때문에 같이 가져온 빵은 되돌려 보냈다. (스페인에서는 기본적으로 빵이 같이 나오는데, 공짜가 아니다. 먹으면 돈을 지불해야 하기에 원하지 않으면 먹지 않거나 돌려보내야 한다.)
어떻게든 기분을 달래 보려고 아내에게 먼저 한 입을 권했다. 거부하는 아내에게 사정사정하며 먹였는데, 이런! 아내의 표정이 한 층 더 굳었다.
“왜? 맛없어?”
나도 얼른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 짰다. 기름지고 짰다.
되돌려 보냈던 빵을 다시 시켰다. 그럼에도 짠맛이 가시질 않았다.
뭐라도 입가심을 하고 싶었지만, 맥주를 시키기에도 아까운 맛이었다. 결국 반도 못 먹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맛없어 보이는 집에 간 것도 내 선택이었지만, 정말 맛없는 음식을 먹고 나니 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피로가 밀려오며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아내는 어떻게 견디고 있었을까.
가뜩이나 체력이 좋지도 않은 아내가 난생처음 28km를 걷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거리를 방황하며 억지로 세 곳의 식당을 들렀으니, 기분이 안 좋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곧바로 사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침묵을 유지한 채 숙소를 향했다.
아내는 씻지도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아내와 만난 지 7년 정도가 되었는데, 안 씻고 침대에 누워 자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고기 찜, 생수 : 9.7유로(약 13,000원)
세 시간쯤, 죽은 듯이 잠을 자고 겨우 일어나니 아내에게 미열이 났다. 얼마나 피곤했을까,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내 생각이 짧았다고.
내 욕심이 분명 지나쳤다. 시작은 분명 우리의 시간을 영상으로 기록한다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금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렇게 우리의 여행이 조금씩 방해받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내 욕심에 제동을 건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점심은 무리한 스케줄로 맛있는 음식을 즐기지도 못했고, 아내와 행복한 시간을 가지지도 못했다.
대신 저녁은 좀 더 편안하게, 우리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컨디션이 안 좋은 아내는 집에서 쉬기로 하고, 내가 음식을 포장해 와 집에서 같이 먹기로 했다.
혼자 나오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나와서 또 맛집을 찾아 헤매는 내 모습을 보니 혼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점심때 못 간 앙헬로 향했다. 이곳은 Chamiñon(참피뇽)이라고 불리는 양송이 타파스 한 메뉴만 파는 곳인데, 그 사실 만으로도 맛집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실제로 식당 앞을 가니 다른 가게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사람이 바글거렸다.
철판에서 구워지는 양송이의 연기로 가게 앞이 뿌옇고, 짙은 버섯구이 향이 진동했다.
바 자리에는 중학교 매점처럼 사람이 몰려들어 소리지르 듯 주문을 했는데, 나도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겨우 비집고 들어가 양송이 타파스 세 개를 주문했다.
집에 가서 먹어본 결과... 다섯 개를 사지 못한 게 후회되었다. 이때까지 먹은 타파스 중 가장 맛있는 타파스라고 할 수 있다.
모양이 그대로 살아있는 양송이는 그릴에서 골고루 구워져 올리브오일과 소금, 파슬리 가루만 올려져 있는데, 한 입 씹을 때 퍼져 나오는 향과 즙이 황홀함 마저 느껴지게 했다.
혹시 로그로뇨를 들린다면 여기는 꼭 가보시길.
양송이 타파스 3개 : 4.2유로 (개당 1.4유료!) (약 6,000원)
Pulpo(뿔뽀)는 스페인어로 문어를 뜻하는 데, 특히 스페인 북부 지방에서 이 문어 요리가 유명하다. 양송이버섯만 사 가기 아쉬운 마음에 타파스 바 몇 군 데를 더 들려 뿔뽀 요리를 찾아내었다.
빨간 양념과 올리브 오일에 버무린 문어 요리인데, 빨간 양념은 파프리카 가루로 역시나 전혀 맵지 않다. 그럼에도 스페인의 문어는, 어떻게 삶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부드럽다.
뿔뽀 : 15유로(21,000원)
맛집 탐방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음식을 사 와 숙소 안에서 아내와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내 역시 양송이 타파스의 맛에 감탄했다.
우리는 태블릿으로 무한도전을 틀고, 이미 몇 번이고 본 장면에 또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장난을 쳤다.
길고, 지쳤고, 욕심 많았고, 험난했던 하루가 끝이났다.
오늘 걸은 거리는 산티아고 길 28km에 타파스 맛집 방황을 더해 총 33.5km,
51,037 걸음을 걸었다.
<80일간의 신혼여행>은 매주 월요일(가끔 수요일에도) 업로드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