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7 문제는 인구밀도
지금 같다면, 산티아고 다시는 안 올 것 같아요.
길을 걷다가 만난 한국 분의 말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로 산티아고를 걷고 있는 분이었는데, 원래는 살면서 산티아고를 몇 번이고 걸을 생각이었지만 2023년 봄의 산티아고를 걸으면서는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지금은 내가 사랑하던 산티아고 길과 너무 달랐다.
아내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지 9일 차.
아내는 여행 출발 직전 뒤꿈치를 크게 다쳤고 나는 길을 걸은 지 3일만 심하게 체기를 앓았다. 그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기적적으로 아내의 뒤꿈치도 나의 속도 회복이 되었다. 말썽이던 몸이 이제는 길에 적응을 좀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여전히 골칫거리였다. 바로 숙소와의 전쟁이다.
산티아고 길을 걷기 시작한 첫날부터 숙소를 잡지 못할 뻔했고, 이후로는 3일 치를 미리 예약하며 다니고 있다. 이런 고민은 우리뿐만 아니라 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의 걱정거리였는데, 식당이나 바에 앉아 있으면 옆 테이블에서 가이드북을 펼쳐놓고 숙소 예약에 바쁜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일반 여행지와 다른 산티아고 순례길의 특수성에 있다. 매일 수십 km를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 다니는 ‘순례자’들은 바로 다음날, 아니 당장 오늘 오후의 내 몸상태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30km 떨어진 마을에 숙소를 예약해뒀는데 10km쯤 가다가 갑자기 무릎에 통증이 심하게 느껴진다면?
예약이 있으니 억지로 20km를 더 걷든가,
버스나 택시를 타고 이동하든가,
예약을 취소하고 숙소를 다시 잡아야 한다.
하지만 억지로 더 걸으면 분명 몸에 문제가 생겨 결국은 걷기를 중단해야 할 만큼의 부상이 생길 수 있고,
버스나 택시를 타면 오롯이 내 힘으로 길을 걸어 나가는 경험을 하지 못해 아쉬움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예약을 취소하고 새롭게 방을 구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이미 모든 숙소는 예약이 꽉 차있다.
내가 걸었던 지난 두 번의 산티아고는 이런 걱정이 필요 없었다.
몇몇 구간을 제외하면 숙소 예약에 대한 걱정은 거의 하지도 않았고, 길을 걷고 싶은 만큼 걷다가 멈추고 싶으면 멈출 수 있었다. 머리를 비우고 길을 걷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다르다.
문제는 숙소에만 그치지 않는다. 길 위에 사람이 너무 많아지며 왠지 모를 경쟁감이 생긴다. 숙소 예약에 실패한 혹시 다음 마을에 자리가 있을까 싶어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고, 세탁기를 선점하기 위해 짐을 내려놓고도 쉴 수 없다. 실제로 오늘 묵은 숙소 앞 세탁소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세탁기를 사용하기 위해서 1시간을 서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느낀 가장 큰 아쉬운 점은 사람들 간의 따뜻함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과거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가장 좋았던 것은 사람들의 친절함이었다. 일주일 정도 걷고 나면 익숙한 얼굴들이 생긴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같이 어울리며 친하게 지내는 게 아니어도 길을 걸으며 몇 번 마주친 얼굴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잘 걸으라는 응원 – ‘부엔 까미노’를 건넨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같은 길을, 같이 고생하며 걷는다는 것에 뭔지 모를 동지의식이 생긴다.
알베르게나 식당의 주인들은 일면식도 없는 여행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어디에서 왔는지, 얼마나 걸었는지, 오늘은 어디까지 가는지. 그리고 항상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헤어진다.
어딜 가든 일반적인 여행자가 아닌 ‘순례자’로 나를 반겨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산티아고 길이 푸근해졌다.
하지만 지금 산티아고 길에는 그런 응원과 인사가 많이 사라졌다. 물론 여전히 일반적인 관광지에 비해서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지만, 순례자끼리는 경쟁하고, 주민들은 여행자가 많아지며 불편을 겪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식당 주인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와중에 미국에서 온 관광객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 말을 들어보니 길의 예쁜 구간만 걷는 패키지 상품이 있다고 했다. 물론 길을 즐기는 방식은 다양하고, 산티아고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그냥 일반적인 관광지와 다를 바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함께 시간을 내어 이 길을 걷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체력 증진이다. 하지만 내가 이미 이곳을 두 번이나 왔음에도 아내와 다시 한번 온 것은 고요함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었고 사람들 간의 따뜻함이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적거리는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게 즐겁지 않았다.
…
그런데, 정말 산티아고 길이 북적이는 걸까?
아니, 정확히는
모든 산티아고 길이 북적일까?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프랑스 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 북서쪽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성당을 목적지로 걷는 길이다. 출발지는 다양하고, 따라서 산티아고 길의 수도 다양하다.
어떤 길은 포르투갈에서 출발하기도 하고, 어떤 길은 이탈리아서부터 나 있기도 하다. 우리가 걷는 프랑스 길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을 근처에 있는 ‘생장 피에드포르’라는 프랑스 마을에서 시작해 ‘프랑스’ 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프랑스 길이 유명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역사적으로 많이 걸은 길이라는 점, 그러다 보니 다른 루트에 비해 알베르게나 이정표, 기타 편의시설 등이 잘 갖춰져 있다는 점, 역사적 유물이나 교회 등 전통성이 강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이유를 생각하다 보니, 꼭 프랑스 길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아니 오히려 그 유명세 때문에 사람이 너무 많아진 것이라면 다른 길로 가는 게 더 좋은 것 아닐까?
그때 떠오른 것이 바로 ‘북쪽 길(Camino Del Norte)’이다.
사실 여행을 떠나 오기 전에 아내와 한 차례 고민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 길이냐 북쪽 길이냐. 아내는 사람이 적은 곳을 선호해 북쪽 길에 가고 싶어 했지만, 나는 프랑스 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가 있고, 북쪽 길에 비해 프랑스 길이 걷기 더 수월하다는 점, 그리고 유명해져 봤자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하는 생각에 프랑스 길을 적극 추천했다.
그렇게 이 길을 걷게 됐고, 북쪽 길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산티아고 길에 사람이 북적인다고 아쉬워했는데, 다시금 북쪽 길이라는 선택지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래도 벌써 180km를 넘게 걸었는데, 이제 와서 북쪽 길로 넘어가긴 아까운데…
사실 뭐가 아까운 건지는 우리 둘 다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 동안 고민해 보기로 했다.
프랑스 길 걷기를 멈추고 북쪽 길로 넘어갈 것인가?
각각의 장단점은 무엇일까?
우리는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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