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날

11월 6일의 기록

by 무웉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사실 군대에서의 내 일상에서 너를 지워내면 지나칠 정도로 단순한 옅은 무늬만이 남는다. 반복되는 단순한 무늬같은 나날도 벽지에 쓰이는 것처럼 거기에서 오는 평화로움 계열의 아름다움이 있기는 하다. 그래도 역시 인간이라면 조금의 변주가 있기를 바란다. 나도 작은 별 변주곡 맨 마지막에 나오는 화려한 기교를 곁들인 변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스타카토같은 날 정도는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오전에는 정신전력교육 관련 감사를 나온다고 했다. 한미동맹의 중요성에 대해 영상을 보고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걸 말하는 건 내게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내게 대표로 발표를 맡긴 중대장님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했고, 사령부에서 감사를 위해 나오신 분도 내가 발표하는 사진을 몇 장 찍어가셨다. 선임들까지 전부 다 매우 만족한 눈치였다. 상점도 벌고 모두의 인정도 받으니 매우 좋았다. 역시 나는 남들의 인정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오후에는 문화의 날 행사가 있어서 우리 중대가 다같이 영화를 보러 나갔다왔다. 영화 시작시간이 비슷한 영화들 몇 개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청설'이라는 영화를 골랐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꽤 잘한 선택이었다. 대만의 매우 유명한 로맨스 영화가 원작인만큼 재미도 있었고 영상미가 상당했다. 주인공들은 일부러 옅은색 청바지에 흰 티셔츠, 파스텔톤의 겉옷을 입었고, 연두색 나뭇잎에 햇살이 부서지는 풍경을 카메라에 자주 담았다. 수영장도 기본적으로 하늘색 타일로 만들어졌다보니 스크린에서는 내내 여름냄새가 났다. 한편으로는 여름 냄새를 나게 하는 방법을 모두가 알게되어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햇살이 자꾸 닿으면 색이 바래듯이 햇살 자체도 자주 사용되면 색이 바래는 법이니까. 그래도 꽃향기로 착각할만한 냄새를 가진 향수를 개발한 인간인데, 계절에 대해서도 그러지 못하는 법은 없었다. 카라멜 팝콘과 콜라도 오랜만에 먹으니 너무 맛있었고, 맛보다도 사회인으로 살아간다는 착각을 일으켜서 좋았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걸 바다로 착각해서 길을 잃어도 괜찮은 오후였다.

작가의 이전글다시 일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