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이의 위대함, 위대한 이의 평범함 하나(上)

격동의 시대를 함께 거쳐온 언론인 최 기자와 영원한 학생 정 선생

by 최승혁


최 작가 – 글쓴이


지성 탐험가, 돌아온 탕자. 2000년 울산광역시에서 태어나 옥동초등학교, 학성중학교를 졸업했다. 학업에 열중하여 포항제철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갑작스러운 지병으로 인하여 고등학교를 며칠 만에 중퇴,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2년 뒤 마음을 다잡고 학업에 열중하여 1년 뒤 검정고시에 합격, 같은 해 수능에 응시하여 2019년 충남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에도 방황이 끊이지 않아 휴복학을 반복한 끝에 중퇴하였다. 이후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법을 배우며 터득한 끝에 내면의 평화를 찾기 시작, 이후 재입학 허가를 받아 충남대학교 1학년 학부생으로서 살고 배우며 사랑하는 지성의 길을 걷는 중이다.


최 기자 – 글쓴이의 외할아버지

믿음직한 해결사, 영원한 기자. 1940년생 현재는 세종시에 편입된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봉산동에서 태어나 조치원 국민학교, 청주 중학교, 대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어려운 형편에서 형설지공의 자세로 공부하여 고등학교에 진학, 야간에 학교를 다니고 주간에 신문사 기자로 재직했다. 이후 직업 전선에 곧바로 뛰어들어 언론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81년 마지막으로 쌍둥이 형제를 낳아 2남 4녀의 가정을 이루었다.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충남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나가기도 하였다. 대전 검찰청 청소년 선도위원, 노인회 회장, 서구지회 부회장 등 다양한 단체에서 중책을 맡으며 지역 사회를 위해 헌신하였고, 80세가 된 이후에도 사회적인 공공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선생 – 글쓴이의 외할머니

공부에 대한 열정이 식을 줄 모르는 학생, 가족에 평생토록 헌신한 어머니. 1944년, 일본 출생. 해방 이후 그의 아버지와 대한민국에 돌아와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에 살기 시작했다. 당시 부면장이었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여 학업의 길을 끝마치지 못하고 기술을 배워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자식들을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수십 년동안 가정을 위해 헌신하였다. 학업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늦은 나이에도 불구, 영어와 일본어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외조부모님과의 인터뷰에서 간추리고 글의 특성과 목적에 맞게 각색해 소설의 형태로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시고 값진 경험을 공유해주신 조부모님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당신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분이네.”


대학교에 우뚝 선 시계탑의 시침이 밤이 깊어감을 알릴 때쯤, 최 기자는 그렇게 나지막히 첫 마디를 꺼냈다. 짧은 문장이었으나, 그 속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당신 아버지는 어려서 할아버지를 떠나보내셨기 때문에 고독하고 힘들었지. 친할머니께서는 강인한 서귀포 해녀로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둘 다의 역할을 해야 했고, 그는 집안 첫째 아들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지며 살았지. 어렵게 공부하여 서울대학교에 들어갔지 않았던가. 대단한 거야.”

최 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힘든 시기였죠.”

“그랬었지.”


최 기자는 이내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네를 정말로 사랑하네. 허나 때로는 그 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았었던거야.”

과거의 그였다면 필시 인정하지 못했을 발언에, 최 작가는 덤덤히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

“분명 그랬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모로서 처음이었으니까요. 저 역시 아들로서 처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인이 나지막히 웃었다.

“그 때 나와 정 선생은 그들에게 자주 이야기하였지. 가만히 두고 멀리 떨어져서 지켜본다면, 최 작가는 자신의 길로 돌아올 것이라고. 부모님은 잘 그러시지 못했더군.”

“그 당시에는 그들을 정말 미워하고 증오하였습니다. 부모, 세상,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도 분노에 휩싸여 갈갈이 찢어버리고만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수많은 갈래길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나의 길을 지나오며, 그들의 마음의 일부분이나마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진실된 사랑을요. 진실되고 순수한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그것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순수합니다. 너무나도 순수했던 나머지, 그것이 현실에 표현될 때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순수함이 희석될 수 밖에 없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에 끝은 볼 수 없고, 아무리 퍼내어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다는 사실또한.”


그의 말에 경청하던 최 기자의 눈빛에 놀라움이 감돌았다. 최 작가는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개인주의자였습니다. 나 자신이 성공하길 바라고, 부자가 되길 바라는, 누구나 한번쯤 바라는 지극히 보편적인 소망을 가지고 살아왔었어요. 그러나 내가 아는 세상이 산산히 조각났던 그 때와 그 이후의 끝없는 방황을 겪고 난 이후, 저는 저 스스로에게 더 집중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저의 내면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눈부시기보다는 따스했습니다.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둠이라 한들, 꺼져가는 희미한 불빛조차 완전히 집어삼킬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 그 광휘를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소망을 느꼈습니다. 물론 이는 강요하지 않고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만입니다.”



……



“최 기자님께서는 저의 외조부이시나 인터뷰의 형식으로 대화하는 것이므로 성함과 출생지를 알려주십시오.”

최 기자는 즐거운 듯이 웃으며 이에 대답했다.

“나는 1940년 충청남도 연기군의 조치원읍 봉산동에서 태어났네.”

“일제 강점기 시기였군요?”

“혼란한 시기였지.”


최 작가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하지만 최 기자님, 충청남도에 그런 지역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이제는 세종시에 편입되었기 때문이지.”

지역과 도시가 변하던 그 까마득한 시절부터 그는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륜과 경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어. 내가 10살일 때 북한이 38선을 넘어 대대적으로 침략해왔네. 국민학교 3학년이었던 것 같군. 당시에는 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어. 교육의 기초적인 인프라가 부족했던 거야. 중학교는 대부분 나왔지만, 개중에서 공부에 뛰어난 사람들만이 고등학교에 진학했어. 대학 진학자는 더더욱 적었지. 충남대학교가 언제 세워졌던가?”

최 작가는 뜸을 들이고선 답했다.

“아마 1952년이었을 겁니다. 1951년 전쟁 중 당시 피난 왔던 민태식 교수님과 다른 교육자들이 합심하여 세운 전시연합대학의 후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그랬던가?”

노인은 그 시절을 떠올리는 듯 보였다.

“공부를 전념하는 것이 어려운 시대였지. 다들 먹고 살기 힘들었어. 공장에 취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지.”

“각자도생이었군요.”

“그랬지.”

“전쟁 이후 국가는 초토화되었어. 선생들이 모여 임시로 교육을 이어나가고, 미국의 원조도 많이 받았었지. 밀가루가 대표적이었어. 입을 옷조차 없었다네. 누더기 천에 이가 바글바글했던 건 흔한 일이었지.”

“씨레이션도 많이 원조해주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씨레이션?”

“원통형의 금색 통조림입니다.”

최 작가는 언젠가 사진에서 보았던 통조림의 모양을 설명했다.

“아, 대단히 비싼 물건이었지.”

“당시 국군 장교의 월급으로도 구매하기 힘든 물품이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맞는 말이네.”

최 기자는 어려웠던 중학교 시절을 풀어내기 시작하였다.

“당시 내가 살았던 곳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힘들었어. 그래서 청주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지. 청주는 교육을 그나마 잘 받을 수 있는 도시였거든. 새벽에 나가서 밤에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네. 야간에 학교에 다녔어.”

“그렇다면 새벽부터 청주에 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신문사 아르바이트를 했네. 학비가 모자랐거든. 주간에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야간 학교에 다니며 공부했네. 학교가 11시에 끝났던 것 같군.”

“밤에 오셔서 새벽에 다시 나가시면 주무신 시간이 4시간도 채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래도 건강하고 젊었기에 버틸 수 있었어.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살아남아야한다는 공통적인 시대적인 생존 의식이 있었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단함이 느껴지는군요.”

“난 1980년대까지도 그렇게 바쁘게 일했네.”

“마흔이시던 때에도 말입니까?”

최 기자와 최 작가를 지켜보던 정 선생이 대신 대답했다.

“그래. 그 다음 해에 당신 큰 삼촌과 작은 삼촌을 낳았었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그는 줄곧 자신의 인생과 가정에 충실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는 집안의 거인이었다.


정 선생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69년도에 첫째 딸을 낳았었어. 당시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딸을 잘 돌보고자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일에 전념했었지.”


이야기의 물결이 산맥을 수십 번 흘러넘어 어느 새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최 기자는 사뭇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일단 식사하고 마저 이야기하세나.”

그 말에 최 작가와 정 선생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녁을 먹는 와중에도 그들의 열띤 대화는 끊이질 않았다.



-下편에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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