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 아가씨

by 회인

지난해 여름 우리 집 텃밭 정원을 방문한 문인들 손에 작으만한 동백꽃 화분이 들려있었다. 동백꽃이야말로 매서운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한겨울에도 뜨거운 꽃봉오리를 피워 올리니 천생 집주인을 닮았다고 덕담까지 했다. 초록집 앞 양지바른 곳에 정성껏 심고 보니 물이 오른 가지마다 선홍색 봉오리가 야무지게도 매달렸다.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큰 손녀가 이번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제주도에 가고 싶단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여러 번 다녀왔다고 해 봤지만 기억나지 않는다고 시치미를 뚝 잡아뗀다. 가물가물한 기억의 뒤 꽁지를 붙잡아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제주도에 가면 어디부터 가고 싶냐고 했더니 동행할 제 사촌과 입이라도 맞춘 듯 동시에 동백꽃 정원이라며 환호한다.


한겨울의 제주도는 역시 바람 천국이다. 밭둑에 숭숭 뚫린 돌담을 넘어 민둥산 꼭대기 오름까지 거침없이 휘몰아친다. 초등학생 두 아가씨는 거인처럼 버티고 서서 신나게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날개를 가리키더니 손가락을 눈에 대고 마구 돌리는 시늉을 하고 있다. 꼬마 아가씨들 마음은 벌써 바람이 되어 하늘 건너편까지 날고 있는 게 분명하다. 보여주고 싶은 곳도 많고 갈 곳도 많다. 제주도에 왔으니 한라산 백록담에 물이 가득 찼는지 아닌지 가보지 않겠냐고 몇 번을 떠 보았지만 고개를 내젓는다. 감귤 따기 체험을 해보자며 미리 부탁해 놓은 한라봉 농장을 방문해서 다시 얼러 보았지만 동백꽃 정원에만 진심이다. 갓 따서 상쾌한 한라봉을 두어 개씩이나 뚝딱 해치우고도 마음을 바꿀 기색은 전혀 없다. 바람 부는 대로 갈 것 같으면서도 고집불통인 맹랑한 아가씨들이다.


동백꽃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와서 이게 웬 청승이냐고 투덜거리는 사이 꼬마 아가씨들 등쌀에 이미 동백꽃 정원 입구다. 동백꽃이라면 해운대 동백섬도 있고 남도 끝 백련사의 동백숲도 있다. 선운사 뒤편에도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있고 가까운 서천 마량리 동백숲에도 지천이다. 공짜로 보아도 시원찮은데 입장료까지 왜 이리 비싸냐는 말을 할 겨를도 없이 어서 빨리 줄을 서란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까지 너무 많다. 표를 끊어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데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쿠폰을 보여주면 된다면서 소매를 잡아 이끈다. 할아버지가 생각해 온 동백꽃 정원은 완전 구식이요 청승맞다. 하지만 꼬마 아가씨들한테는 산뜻하고 신비로운 카멜리아 가든이다.


때론 아이들이 맞다. 좋아 죽어라며 신나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니 여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발을 들인 동백꽃 정원은 기대 이상이다. 숲으로 나무로 꽃으로 다가온 동백꽃의 물결과 향기에 금세 빠져들고 말았다. 크고 작은 꽃들이 여리거나 진한 붉은색으로 피어올라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세상의 근심 걱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어느 곳에서 이처럼 찬란하면서도 신선한 향기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으며 이토록 고요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영접하겠는가. 동백꽃은 떨어진 꽃송이조차 어여쁘다. 여느 꽃과 달리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전한 모습 그대로 땅에 떨어져서도 다시 꽃을 피운다. 동백꽃들의 속삭임에 홀려 시간이 언제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여길 괜히 들어가는 것 아니냐며 마지막까지 꾸물대던 내가 가장 늦게까지 동백꽃 정원에 흠씬 빠진 것이다.


우리 집 텃밭에 심은 동백은 꽃 한번 피우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추어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벌써 얼어 죽었지만 차마 뽑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동백꽃을 보내줄 시간이다. 아직도 흐트러지지 않고 의연히 맺혀있는 봉오리들을 거두어 가슴에 묻어야 한다. 가을이 깊어 가던 지난주에 문인들 모임에서 색소폰 연주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청중은 대부분 나이 드신 분들이다. 지난여름의 동백꽃 화분이 떠올라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선곡했지만 그것은 너무 청승맞다. 피아노 반주를 맡은 친구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 ‘모란동백’이 낫다며 눈짓을 보낸다. 그래 이번 연주는 동백꽃이 나오는 2절까지 온전히 해야 한다.


동백은 벌써 지고 없지만 세상에 바람 불고 덧없을 때,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는 꿈속에 찾아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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